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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zetto Apr 16. 2024

숨기고 싶은 감정은 꽃처럼 피어나더라(1)

부산 & 잠실. 롯데시네마. 세기말의 사랑.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2편으로 나눠서 연재됩니다.


어떤 감정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숨기려 할수록 겉으로 더 튀어나오려고 해 당혹스럽게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특히나 그렇다. 이 감정은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눈치도 없다. 얼마나 눈치가 없느냐면 정작 그 감정을 보여야 하는 상대에게는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잘 드러난다. 숨긴다고 했지만 남들에게는 빤히 보이는 이 감정은 이름도 다양하다. 사랑이라는 흔한 이름만이 아니라 내로남불이라는 유명한 격언에서 알 수 있듯 로맨스 혹은 불륜이라 불리기도 하고 치정, 바람, 운명 등 상황따라 그 순간 감정의 깊이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은 이 감정에 대해서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언제나 당사자들은 사랑-로맨스-운명으로 생각하지만 때때로 주변인들은 불륜-치정-바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감정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진짜 모습이란 것이 있긴 할까? 이 감정에 진짜 모습이란 것이 있다면 이토록 다양하게 피어나가는 모습 자체가 아닐까 한다. 그 모습이 사람에 남아있다면 누군가는 상처로 누군가는 꽃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꽃으로 보는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 할 것이다.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사랑의 여러 모습을 담고 있는 종말 영화이다. 대체 언제까지 종말을 붙들고 늘어지냐고 하겠지만 일단 들어보자. 매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종말은 설명하기 쉬운 수단일 뿐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각설하고, <세기말의 사랑>은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숨기려 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끝, 그러니까 어떤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 간 충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걸지도 모른다. 그저 자기 감정에 자신만이 취한 채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니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감각 없음(無感覺)과 같고 그것은 어떤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과 같다. 하지만 삶에서 감각이 없을 수 없고 감정도 드러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드러난 이상 거침없이 퍼져나가고 퍼져나가는 와중에 수많은 부딪힘을 겪으면서 감정의 모습은 종잡을 수 없어진다. 아마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닌 이상 감정의 모습은 시작과 끝이 끝도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기말의 사랑>이 그리는 퍼져나간 감정의 모습과 도달한 끝, 그러니까 종말은 무엇일까?

출처. 네이버

1. 무색의 영원이 색의 영원으로

<세기말의 사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연출이라면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바뀌는 연출일 것이다. 세기말이라 불리는, 사실 왜 세기말이라고 불리는지도 알 수 없는(이러한 인식은 아마 배우 이유영에 대한, 스크린 너머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영미'(이유영 분)의 삶이 새천년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는 손쉬운 연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 이렇게 간단한 연출로도 한 인물의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영미라는 인물을 알 수 있는 흑백 영화 부분과 컬러 시점에서 보이는 영미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전환하는 연출은 단순히 손쉬워 보이는 연출이 아니라 현실과 영화 사이를 가르는 어떤 경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허무는 연출처럼 느껴진다. 즉,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는 연출은 <세기말의 사랑>이 그릴 감정의 모습,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그 감정의 경험이 언제 삶에서 가장 활짝 피어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한 필수적인 연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흑백 배경의 영미를 보자. 어린 시절부터 큰엄마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영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에 능하다. 감정을 감추는 것에 능한 영미는 경계가 명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흑백 시점에서 영미는 공간적으로 직장인 정직테크의 경리실과 낡은 큰엄마의 집만 오고가는 삶을 산다. 삶의 공간이 경계가 명확하기에 인간관계도 경계가 명확하다. 직장에서는 남직원들에게 뻐드렁니가 난 얼굴이 엉망이라며 세기말이라고 불리며 배척당하고 집에서는 알코올 중독에 치매에 걸린 큰엄마를 간호하는 삶을 산다. 영미가 가끔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부업으로 바느질거리를 얻으러 간 세탁소 사장님들 뿐이다. 공간과 관계의 경계가 명확한 영미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은 같은 회사의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 '도영'(노재원 분)을 경리실에서 몰래 바라볼 때 뿐이다. 아마 흑백 시점에서 가장 커다란 감정을 담은 입김 하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입김 하트의 감정이 크게 느껴지는 것은 감정을 감추는 것이 능한 영미가 경계가 명확한 흑백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의 입김 하트에는 최소 회사 경리실에서 몰래 도영을 바라보며 하트를 그리는 모습, 도영이 가는 시간에 맞춰 구내식당에 가는 모습,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 부업을 하며 도영이 횡령한 공금을 채우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담긴다. 영미를 체포하러 온 형사의 말처럼 처음 볼 정도로 큰 감정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이렇게 큰 감정을 흑백 배경은 관객에게 너무나 억압해 보여준다. 공간과 관계의 경계가 명확한 영미는 집에서 알코올 중독과 치매를 앓고 있는 큰엄마를 간호하면서 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돈을 빌리고 잠적한 사촌 오빠에게는 받지도, 돌아오지도 않는 전화를 걸며 돈을 갚아달라고 호소한다. 직장에서는 경리실에서 홀로 근무를 하며 다른 직원들과 교류를 보이지 않고 점심은 혼자 뒷산에서 빵으로 때우는 경우가 허다하고 자신을 보며 세기말이라 수근대는 남직원들에게는 얼굴을 찌푸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처음 볼 정도로 커다란, 도영 한 사람을 향한 감정은 자기 혼자 간직한 채 경리실에서 입김 하트를 그리며 표현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특히 당사자인 도영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을 영미의 감정은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과 다르게 드러나질 못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색채인지 알 수 없다. 도영을 향한 감정만이 아니다. 영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짐작은 가나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큰엄마에게, 잠적한 사촌 오빠 규태(허준석 분)에게, 자신을 놀리는 남직원들에게 어떤 감정적 반응도 보이지 않거나, 반응을 보이다가도 억지로 참고 끊어버리는 영미의 모습은 흑백 배경처럼 어떤 시작도 끝도 없다. 흑백 배경은 이미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영미의 삶을 극단적으로 무색무취무상(無色無臭無像)의 삶으로 만든다. 흑백 배경의 영미는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 없다.


그렇기에 세기말을 살아가는 세기말 영미는 흑백의 시대를 거쳐 유색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속으로 억누르는 영미는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게 전달되고 다시 되돌아오는 교류와 연결의 경험이 필요하다. 감정과 감정이 부딪히지 않은 채 흑백으로 사그라드는 세기말 영미의 삶은 오직 생존만을 위한 삶이다. 돈을 갚지 않은 채 잠수를 탄 사촌 오빠에게 받지도 않을 전화를 끊임없이 걸고. 알코올 중독에 치매인 큰엄마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움켜쥔 채 도영 몰래 회사의 공금을 채우기 위한 부업을 밤새도록 하고. 죽지 못해 움직이고 있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그 삶의 경계를 붙잡기 위한, 정말 말 그대로 생존만을 위한 행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에 흑백의 시대는 유색의 시대로 나아가는 서사적 당위를 얻게 된다. 영미가 자신의 흑백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영미 스스로가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동력도, 이유도 구하지 않고 누구도 영미를 그러한 삶에서 잡아 끌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미 본인이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결과적으로 하지 않던 것을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기에 영미는 새천년이 시작하면서 자신의 오래 묵고 때가 탄 겨울옷을 벗고 형형색색의 얇은 여름옷으로 갈아입어 타인과 살을 맞대어야 한다. 윤기 없고 꼬질꼬질한 검은 머리를 생각지도 못한 주황색으로 염색해야 하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등을 가득 메운 화상을 보여줘야 한다. 살을 맞대고 감정을 교류하며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욕설을 내뱉기도 하며 억누른 감정이 넘실대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쓸쓸한 흑백의 세계에 모든 것이 피어나 눈이 휘둥그레 지는 것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예기치 못한 파격이 필요하다. 삶의 경계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부딪히며 자신의 색, 타인의 색, 세계의 색을 알아가면서 삶의 경계를 조금씩 넓혀가며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모양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기에 유색의 시대에 영미가 만나는 이들은 지금까지 영미가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생각도 안 했던 것들을 하기 위해 만나는 인물도 파격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흔히 말하는 보통의 삶을 사는 이들이어서는 안 된다. 영미와 마찬가지로 흑백의 삶을 살았을 사람, 즉 삶의 경계를 붙잡고 늘어지며 자기 삶의 경계 안을 맴돌며 살았을 약자들이어야 한다. 자신의 남편과 정신적인 바람을 핀 영미에게 돈을 갚겠다며 모습을 드러낸, 지체장애인 유진(임선우 분), 헤어 아티스트를 꿈꾸나 돈도 빽도 없고 자신을 거둬준 유진과 유진의 명품을 몰래 팔아 차도 사고 생계를 유지하는 오준(문동혁 분)과 같은 이들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각자 삶의 경계를 붙잡고 늘어지던 이들이 엉키고 설켜 본 적 없는 파격을 일으켜야 한다. <세기말의 사랑>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으로서 흑백의 시대에서 시작에서 끝을 향해 나아가는 영원으로서 유색의 시대라는, 전혀 다른 톤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 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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