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김소진 배우가 국립극장에서 <맥베스>로 무대에 올랐다. 두 배우의 연기를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갑을 열어 "내 돈 가져가시오!" 해야 했던 이 연극의 가장 큰 걸림돌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라는 점이다. 지금 세대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재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에는 한창 청소년 필독서 100선이니 서울대 교수진이 뽑은 필독서 100선이니 같은 이름으로 독서를 권장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100선에는 거의 매번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본들이 껴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수업 시간에도 셰익스피어의 4대 희극, 4대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들어본 적도 있다. 저 멀리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영국 극작가가 왜 그리도 많이 언급되는지도 모르던 학생 때 이름만 들어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소설화된 판본으로 『베니스의 상인』, 『말괄량이 길들이기』, 『로미오와 줄리엣』 등 몇몇 작품을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원본을 혹은 원본을 살린 번역본을 읽어본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연극 연출을 꿈꾸던 그 시절, 대본 창작 강의를 맡은, 지금도 대학로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 교수님은 학생들 중 잘 만든 고전을 제대로 읽고 서사의 흐름과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학생은 몇 없다는 말로 일침을 날리셨다. 생각해보니 청소년을 위한 쉬운 버전이나 만화책으로 읽었을 뿐 고전 자체를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얄팍한 자신을 부끄러워 했다. 그 길로 서점에 가서 셰익스피어부터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햄릿』을 읽었고 민음사 버전으로 고전을 읽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막아선 것이 셰익스피어의 말년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맥베스』였다.
『햄릿』 원전을 그대로 살린 번역본을 읽었을 때도 오보격처럼 고전 영시들의 운율을 살린 대본에 당황했었다. 그러나 문어체이자 속뜻이 무엇일지 파악해야 하는 대사일지라도 이른바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구조가 명확한 서사 구조이기에 『햄릿』의 인물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맥베스』는 조금 달랐더랬다. 말년의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무엇을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맥베스』는 더 문학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로 기존 비극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주인공을 내세웠다. 2015년 개봉한 <맥베스>를 본 적도 있고 이야기 자체를 모르던 것은 아니라서 어찌어찌 읽기는 했지만 막상 대본 형태로 읽은 『맥베스』는 상상하기도 쉽지 않고 인물들도 이해되지 않아 막상 다 읽고 나서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립극장의 <맥베스>를 예매하기 전 순간 멈칫거리거나 보기 전 혹시 모르니 『맥베스』를 다시 읽으려 할 때 괜히 입술을 깨물어 본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연극을 보기 전 다시 읽었을 때, 실제 무대에서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를 봤을 때 왜 이 연극이 비극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400여 년 전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가 영화 <듄>을 떠오르게 해 흥미롭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화 <듄>을 떠오르게 한 재해석의 요소는 무엇이고 그러한 요소는 <맥베스>의 비극성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맥베스>의 비극성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1. SF적 상상으로 그려진 무채색의 무대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만큼 <맥베스>는 군주제이자 봉건제를 사회제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21년부터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영화팬들 사이에서 화재였던 <듄>도 SF 작품이지만 봉건군주제를 사회제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두 작품의 비슷한 사회제도적 배경은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이미지적으로 관객들이 좀더 편하게 볼 수 있게 차용한 요소로 단정할 수 있다. 특히 고전적인 봉건군주제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정통 사극의 이미지를 강화해 사실적이지만 지루할 수 있다. 과거와 달리 현재는 정통 사극이라는 장르를 대중적으로 접하는 것이 어렵다. 사극 장르의 톤을 시각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의상, 조명 등의 톤을 캐주얼하게 바꾸거나 로맨스와 같은 대중적인 서사를 위한 배경으로 활용하는 정도가 요즘 사극의 분위기이다. 특히나 유럽의 봉건군주제를 배경으로 하는 <맥베스>를 정통 사극의 톤을 유지해 연출하는 것은 한국 관객들의 입장에서 가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극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맥베스>가 <듄>과 같은 SF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정통 사극을 대신할 대중친화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맥베스>가 굳이 <듄>과 같은 SF의 이미지를 덧입는 것도 신기하긴 하다. SF 장르는 한국에서 대중적인 장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듄>도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시리즈이자 대중적이지 않은 SF 장르라는 점으로 인해 한국 관객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듄>만이 아니라 <스타워즈>, <스타트랙>, <닥터 후> 등 본격적인 SF 장르 콘텐츠가 한국에서 대중적인 팬덤을 형성한 바는 없다. SF의 하위 장르인 타임리프 혹은 타임루프 장르가 웹툰과 웹소설에서 대중적으로 향유되고 있으나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본격적인 SF 장르는 한국에서 아직 마니악한 장르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듄>을 떠오르게 하는 의상을 활용했다. 외세의 침략과 반란군을 진압하는 전쟁의 막바지를 배경으로 하는 <맥베스>는 검은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인들이 등장한다. 총을 제외하면 군복은 마치 현대의 군경 특수부대와 같은 모습 혹은<듄>의 황제 친위대인 사다우카, 칼라단 공작군 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군복만이 아니라 여타 인물들의 옷도 검은색이다.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제도적 배경의 영향으로 <듄>의 이미지가 더 겹쳐보이는 의상에 더해 무대의 구조물은 회색 톤이고 소도구는 흰색으로 되어 있다. 무채색의 의상들이 무채색의 구조물을 걸어다니고 무채색의 소도구를 쥐는 <맥베스>의 무대는삭막한 사막을 바라본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맥베스>가 SF 장르 중 <듄>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가장 최근 대중이 접한 콘텐츠라는 점도 있겠으나 시각적으로 세계를 감각하게 하는 색이 한정적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막행성 아라키스를 배경으로 하는 <듄>의 색채는 사막을 중심으로 한 황색 계열로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초인의 능력을 지닌 폴의 모습은 한정적인 색채 속에서 이따금 등장하는 푸른색 눈처럼 눈에 띄게 되며 황량한 사막 행성을 구원해 거대한 전쟁의 재앙으로 밀어넣는 초인의 서사는 극단적으로 강화된다. 특히 사회제도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어떤 특정 인간의 혈통과 능력이 중요한 봉건군주제에서는 이러한 한정적인 색채가 주인공인 폴의 서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맥베스>의 무채색 무대를 바라볼 수 있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마녀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되면서 욕망이 치밀어 오르게 된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국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란군을 제압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글라미스에 코도의 영주까지 된 맥베스. 그는 마녀들에게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마치 처음 자신만의 욕망을 깨달았다는 듯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무채색으로 채워진 무대에서 욕망의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맥베스의 모습은 봉건군주제의 사회에서 가장 개인적인 자유의지로 무채색을 넘어 가장 다채로운 색채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맥베스>의 SF적 상상력이 곁들여진 무채색 무대는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관객에게 욕망의 비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하는 영리한 무대이다. SF 콘텐츠 중 <듄>은 절대자 혹은 초인에 대한 경계라는 주제의식을 위해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제도적 배경을 활용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 관객들의 인식에서 미래도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일 것이라는, 안일할지도 모를 인식에 반동적인 자극을 주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맥베스>는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제도적 배경을 활용해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깨달은 맥베스라는 인물을 조명한다. 이러한 조명에서 무채색 무대는 황색 계열로 한정되어 있는 <듄>의 색채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황색 계열로 주인공 폴의 초인적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듄>처럼 <맥베스>의 무채색 무대는 봉건군주제 사회에서 신분에 맞게 왕실에 충성을 다하나 마녀들의 목소리로 자신의 욕망을 처음 깨닫게 되는 영주 맥베스에게 집중하게 한다. 색깔이라는 개념 자체를 감각하기 어려운 무채색 무대에서 관객은 다채로운 색으로 타오르는 맥베스의 욕망을 육체적으로 감각하여 몰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