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안으로 굽는 팔에 더 많이 안기길 바라며(3.5)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과 결국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같이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엄마(오민애 분)'와 '그린(임세미 분)'의 갈등은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니다. 살아온 인생과 더불어 자신의 현재와 거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미래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존재의 갈등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남편이 없는 중년 여성의 미래는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며 존경을 받았으나 말년에는 치매를 앓으며 가족도 없이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제희(허진 분)'이다. 곧 있으면 제희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자기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기다릴 것이라는 미래는 엄마의 입장에서 제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자 딸 그린에게 '레인(하윤경 분)'과 헤어지고 결혼하라고 강요하는 이유이다.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미래를 그대로 답습하게 둘 수 없다는 사랑으로 엄마는 그린을 마주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그린에게 보이는 미래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 혹은 공동체이다. 이른바 정상으로 분류되지 않는 섹슈얼리티 혹은 성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사회는 그린의 입장에서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사회이다. 존재부터 부정당하는 사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린은 애초부터 동성애라는 성정체성, 즉 존재를 타고났기에 엄마의 바람은 단순히 부모로서 바람이 아니라 자신을 지워버리는 존재의 살인과 같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린은 가만히 있을 때 마주하게 될 미래를 두려워하고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암울한 미래를 선사하고 싶지 않기에 엄마와 마주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마주하고 있기에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을 상대가 봐주기를 바란다.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대중 영화였다면 어떤 합의점에서 봉합되었을 두 사람의 갈등을 <딸에 대하여>는 제희의 죽음으로 잠시 무마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학교, 기자 등 세상과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그린을, 그린과 자신 사이의 중재자이면서도 그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지하는 레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린도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엄마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당연하다. 각자의 존재 존립과 직결된 문제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딸에 대하여>의 결말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다. 제희의 장례식 이후 아마도 집을 팔고 그린, 레인과 떨어져 살기 시작한 듯한 엄마는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을 독거노인 돌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엄마의 눈에 이전과 다른 광경이 비친다. 버스에서 서로 붙어 시시덕거리는 중고등 여학생 두 명의 모습과 다르게 횡단보도를 함께 손을 잡고 건너는 중고등 여학생의 모습. 그 때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그린과 레인이 가벼운 소꿉장난, 철들지 않은 치기의 관계로 보였다면 지금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걸어 나아가는 가족과 같은 관계로 보인다.
그래, 그렇구나. 엄마의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가 비친다. 조금은 늦었음에도 그 늦은 순간에 서로의 삶과 방향이 불현듯 인지되어 이해된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항상 지금 이 순간 서로를 인지조차도 못할 테지만 결국 지금 이 순간 서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서야 우리는 안으로 굽는 팔 안에서 상대를 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느려도 조금씩 서로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