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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유령들의 마지막 아름다운 환상(3.5)
현대의 이미지로 과거의 신화를 일깨우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이다. 신기하게 올 한 해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를 2편이나 봤다. <행복한 라짜로>(2019)로 이름을 들어본 바 있지만 영화로 감독을 만난 것은 올해 상반기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본 <키메라>(2024)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찾고 있는 도굴꾼 아르투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가 떠오르는 듯했고 과거의 문명과 신화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인상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인상이 <더 원더스>(2024)를 보고 더 강해졌다. 애초에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영화 자체의 외적 이력도 특이하다. 2014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굳이 따지자면 과거의 영화이다. 그런 영화가 왜인지 모르겠으나 10여년의 세월이 지나 2024년에 한국에서 개봉했다. 과거의 신화를 현대의 이미지로 일깨우는 감독의 과거 영화가 현대 한국에서 다시 개봉했다라...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재밌지 않은가? 물론 이런 정보도 영화를 보고 나서 찾다보니 알게 된 것이니 단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처. 왓챠피디아
<더 원더스>는 토스카나의 시골 농장에서 전통 방식으로 벌꿀을 만드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다면 농장, 전통, 가족일 것이다. 재작년 개봉한 영화 중 비슷하게 어느 시골 마을에서 복숭아 농장을 경영하는 가족의 마지막 여름을 그린 <알카라스의 여름>(2022)를 생각해보자.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봤던 농촌 가족의 비극은 이미 10여년 전에 일어나고 있고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유기농과 웰빙이라는 말이 있지만 농촌은 죽어가고 있으며 전통 방식으로 짓는 농업은 잊히고 있다. 오랜 가업을 뒤엎어 휴양지를 세우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더 원더스>에 나오는 '젤소미나(알렉산드라 마리아 룽구 분)'의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더 원더스(The Wonders)>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젤소미나의 가족은 경이롭지도 불가사의하지도 않다. 이들 가족의 삶은 당장 돈이 없어 낡은 양봉 작업장을 최신화하지도 못하고 살던 집에서는 내쫓길 상황이다. 밀려오는 도시의 자본과 죽어가는 농촌의 삶이라는 시대의 물결에서 젤소미나 가족은 아무런 대책이 없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전통적인 양봉만 고집하는 아버지는 도시의 자본을 비열한 거짓말쟁이들의 술책이라 하며 팬티 바람으로 꺼지라 소리만 칠 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더 원더스>에는 뒷 물결에 밀려 사라지는 앞 물결의 슬픔에 집착하지 않는다. 슬픔보다는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지금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즉, 사라지는 것들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슬픔의 주체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벗어버리면 그만인 가발처럼 그저 얄팍하기만 한 이미지들로 사라진 것들을 모방해 감각 해본 적도 없는 어떤 시절을 따라할 뿐이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입에서 춤을 추는 벌들의 모습처럼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TV쇼 촬영을 마치고 섬을 떠나는 배에서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의 여사제를 모방한 듯한 가발을 벗은 '밀리(모니카 벨루치 분)'와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복식을 모방한 의상을 입고 있는 젤소미나가 서로를 마주한 채 웃는 모습은 씁쓸하다. TV쇼 광고를 찍던 순간에 젤소미나는 분장한 밀리를 보며 여신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TV쇼가 끝나자 가발을 벗은 밀리는 늙은 여배우일 뿐이며 전통 양봉장의 딸 젤소미나는 곧 사라질지언정 특유의 경이로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그 장면을 볼 때 씁쓸한 것은 아마도 관객일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지금의 우리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아름다움을 조악하기 그지 없는 모방의 형태로만 만나고 그것을 즐겼다는, 순간의 멋과 힙에 취해 있는 것일 게다. 그렇기에 <더 원더스>의 슬픔은 젤소미나 가족이 주체가 아니라 관객이 주체이다. 효율을 추구하는 지금의 시대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조악한 모방으로만 즐겼음에도 멋과 힙에 취해 있는 우리에게 실체 없는 그림자만 즐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정신을 차리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해버린 과거가 있었다는 초라한 증거로 잔해가 되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사라진 유령들은 자신들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아름다움을 마지막까지 드러낼 뿐이다. 그러한 유령들이 있었다는 착각을 깨닫고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이다. 지금 시대의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리고 있을까? 유령들이 사라져 환상으로 남아 슬퍼하기 전에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