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낭만이 아닌 자본으로 쌓아올린 멀티버스 탑을 간신히 지탱하는 MJ(3.5)
영화 내내 마블이 "우린 틀리지 않았다!"를 외친다. 즉, 데드풀 시리즈만의 모순적 재미가 이어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영화라 할 수 있다. 데드풀 1편이 처음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즐거워 했던 이유는 데드풀이 단순히 제 4의 벽을 깨뜨리며 관객과 대화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니다. 데드풀이 제 4의 벽을 깨뜨리면서 하는 대화들이 관객에게 들렸기 때문이다. 데드풀은 마블의 캐릭터이지만 대중적인 팬덤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애초에 단독 영화를 만들 계획도 없었고 그렇기에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언더독으로서 위치를 데드풀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마블의 인물들이 자신이 영웅임을 증명하기 위해 시련에 맞선 것과 달리 데드풀은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마블 인물들의 행적을 까고, 비웃고, 비아냥댄다. 마블을 까면서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마블에 속한 인물. 즉, 데드풀의 모순적 재미는 언더독의 반란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데드풀 2편부터 이러한 모순적 재미는 서서히 위기를 맞는 듯했다. 데드풀 1편과 2편이 나오던 2016년과 2018년 사이 마블은 인피니티 사가로 연일 고공행진 중이었다. 그렇기에 데드풀 2편에서 데드풀은 언더독의 반란이라는 모순적 재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은근히 자신을 메인스트림으로 불러주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1편에서는 애초에 메인스트림이 되지는 못할 것을 알고 있는 언더독이 악동-반골 기질을 가감없이 분출했다면 2편에서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자신을 이제 마블에서 조금은 인정해주고 메인스트림에 끼워주길 바라는 모양새였다. 다행스럽게도 2편까지 데드풀은 메인스트림이 되길 바라는 언더독이었고 세계를 지키는 영웅보다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와 자신의 연인을 비롯한 가좆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악동이었다. 외적으로도 인피니티 사가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데드풀이 메인 마블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했고. 하지만 3편에서 데드풀은 언더독으로서 위치와 더불어 모순적 재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데드풀은 마블에 속해 있지만 그의 영화 세계는 MCU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현실의 대중매체와 MCU를 뒤섞어가며 마블을 까는 데드풀의 모습은 그의 세계가 굉장히 모호한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인피니티 사가 이후 MCU는 멀티버스라는 단 하나의 논리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이는 데드풀 3편 역시 멀티버스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3편에서 데드풀이 맞이하는 사건은 연인인 바네사, 택시 기사 도핀더, 엑스맨 콜로서스, 틴에이저, 유키오 등과 같은 구체적인 가족들을 구하겠다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전 영화들과 다르게 데드풀의 구체적인 가족들은 모두 데드풀의 생일 파티에서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스쳐지나간다. 3편에서 데드풀이 해결해야 하는 사건은 데드풀의 세계를 수호하는 메인 인물 울버린이 로건(2017)에서 죽으면서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데드풀에게 어떤 구체적인 가족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거대 세계를 구해야 하는 영웅적 퀘스트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영웅적 퀘스트에 데드풀은 죽은 울버린을 대신할 다른 울버린을 데리고 온다는 멀티버스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영화 내내 멀티버스는 재미없다고, 실패했다고, 이제 그만하자는 본인의 대사가 무색할 정도이다. 심지어 스스로를 마블의 예수(Marvel's Jesus, a.k.a. MJ)라 칭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데드풀은 더이상 본인을 언더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세계를 구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언명하지만 동시에 데드풀은 자기 세계를 구하지 못했으나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영웅 울버린의 사이드킥이 아닌 함께하는 메인으로 나란히 서있다. 어딘가 모자란 두 영웅이 그저 서로를 지탱하면서 세계를 구할 퀘스트를 수행할 뿐이다. 3편의 데드풀은 이전의 데드풀과 비교하면 데드풀의 껍질을 뒤집어쓴 좀비가 데드풀인양 연기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추가로 마블의 멀티버스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마블의 멀티버스와 비교할 수 있는 단일 영화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이 떠오른다. 특히나 이번 <데드풀과 울버린>을 보면서 <레디 플레이어 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물론 두 영화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데드풀 3편에서 끊임없이 멀티버스는 틀리지 않았다고 외치는 마블에게 <레디 플레이어 원>이 전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데드풀과 울버린>을 통해 마블은 자신들이 여전히 대중문화의 메인이자 대중문화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멀티버스에 기초한 MCU에 내재한 가능성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득시글거리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그러한 욕망이 폭발한 곳은 보이드이다. MCU에서 잊히거나 관심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모이는 보이드는 컴퓨터의 휴지통과 같다. 필요가 없는 파일들이 버려지나 완전히 삭제되기 전까지는 보관되는 곳. 카산드라 노바, 블레이드, 엘렉트라, 갬빗, X-23 등 보이드는 관심 받지 못하는 영웅과 빌런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깨울 수도 있는 무덤이다. 즉, 보이드를 작동하는 것은 현실 대중과 마블 제작자의 관심과 자본이다.
출처. 키노라이츠
<레디 플레이어 원>은 7, 80년대부터 시작해 감독 본인을 비롯한 전세계 사람들이 삶의 어느 순간 한 번은 보고 듣고 실제로 향유했을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쏟아진다. 단일 영화이지만 대중문화의 멀티버스라 할 만한 이 영화는 개봉과 관람 직후 판권은 어떻게 모았는지, 그 판권을 모으는 데 든 자본은 얼마였을지 등을 가지고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은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표하는 평가에서 지나가는 티끌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이 거대한 대중문화의 흐름 속 한 명이라는 사실과 앞으로도 대중문화는 개인의 삶에서 각자만의 빛을 남길 것이라는 것에 고무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보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마다 경험하거나 아는 대중문화 아이콘은 다를지라도 그것을 자극하며 향수에 젖으면서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자극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이 영화는 모든 대중문화 아이콘을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자신은 어떤 대중문화를 누구와 얼마나 진심으로 즐겼는지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기에 판권이나 자본의 문제는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표하기 위한 감상 중 지나가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판권과 자본에 대한 궁금증이 들지 않는다. 영화 중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디즈니-마블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 인물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마블의 멀티버스는 서사적 완성도보다 자본적 성공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서사이다. 인피니티 사가 이후 마블의 멀티버스에는 계속해서 보이드가 작동했을 것이다. 해당 인물로 자본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라는 대원칙 하에서 폐기와 제작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영화가 거대 자본에 기초해 제작되는 콘텐츠이지만 마블의 멀티버스는 거대 자본이라는 언어로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본이 모인다. 그러한 자본으로도 제작이 어려운 지점은 대사로 날리면 그만이고 그게 아니면 지나가는 카메오든 잠시 등장하는 인물로 써먹으면 그만이다. 관객에게는 해당 인물과 감정적 유대를 쌓는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에 대한 유사 오타쿠적 지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마블은 계속해서 관객에게 자신들이 대중문화로서 삶을 함께하고 있다고 강요할 것이다. 구체적인 인물이 아닌 추상적인 세계로서 끝나지 않을 이야기라 관객은 감정적인 유대를 쌓지 못해 향수에 젖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 <데드풀과 울버린>에서 보이는 마블 멀티버스의 질리는 지점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영화평론가 박동수님의 "이 멀티버스인지 뭔지 질리지 않아?"를 읽어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