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텍스트의 한 줄 평들이 궁금하시다면 왓챠피디아(Gozetto)나 키노라이츠(Gozetto1014)를 보시면 됩니다.
세상을 향한 부르짖음이 사랑을 향한 울부짖음이었다는 당혹감(3.0)
영화를 보는 내내 굳이 조커라는 캐릭터를 사용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커>(2019)와 <조커: 폴리 아 되>는 광기와 폭력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커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다. <조커>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이 조커로 거듭나게 된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거리의 광대에서 유명한 스탠딩 코미디언이 되어 세상에 기쁨을 주고자 하는 사회 부적응자 아서가 조커가 된 이유는 고담 시티의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혐오라 할 수 있다. 이 때 고담 시티의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혐오는 소유에 따른 사회 계층과 연관되어 중산층 이하 계층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커의 등장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조커>는 조커라는 인물의 탄생을 통해 고담 시티로 대변되는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를 엿보게 한다. 여기서 광기와 폭력을 통해 고담 시티를 한순간에 파괴의 현장으로 바꾼 조커가 공포스러운 것은 단순히 고담 시티와 같은 일이 실제 현실에서도 발생할지 모른다는 섬뜩한 감각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사에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비춰볼 때 <조커>의 가장 큰 공포는 조커가 되는 아서를 관객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는 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조커>에서 관객의 공감은 실제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오는 즐거움 즉, 영화적 핍진성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실재적인 감각이다. <조커>의 고담 시티가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라면 아서-조커는 바로 관객 자신이기 때문이다. <조커>는 관객에게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가는 과정 즉, 아서 플렉의 삶을 관객에게 적나라하고 밀도 있게 노출시킨다. 영화라는 대중문화물에서 관객은 아서-조커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양극화로 물질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산층이라 할 것이다. 중산층 이하 계층의 상호 혐오가 만연한 고담 시티에서 조커가 되어 가는 아서를 관객이 공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공감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이성적 인식 보다 영화와 현실이 유사하다는 감정적 인식이 강력하게 작용해 관객은 조커의 악행을 단순한 악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악행으로 인식하게 되고 조커에게"오죽하면..."과 같은 일말의 감정적 면죄부를 주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입의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이 고담 시티에서 고난을 겪다 결국 조커가 된 아서가 된다는 감정적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적 착각이 <조커>가 주는 실재적인 공포이다. 마치 현실의 도시에서 자신을 비롯한 시민 중 조커가 있을 수 있다는 공포스러운 해방감, 즉 선을 넘는 것의 해방감이 주는 공포말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조커>가 사회에 기반해 조커를 조명하고 있다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 개인에 집중해 조커를 조명한다. 고담 시티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행복과 자신을 향한 진실된 사랑을 찾다 광기와 폭력의 조커가 된 아서는 무고한 시민을 살해했다는 죄로 재판과 사형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서-조커는 조커로 남거나 조커와 헤어지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아서-조커의 선택의 서사와 관련해 <조커: 폴리 아 되>는 가장 중요한 외부 사건으로 '리 퀸젤(레이디 가가 분)'과 만남 및 관계만을 제시하면서 리 퀸젤과의 관계에 집착하며 행동하는 아서-조커 개인에게 집중한다. 즉, <조커: 폴리 아 되>는 고담 시티라는 사회와 아서-조커라는 개인 사이 관계에 집중한 <조커>와 달리 아서-조커 개인의 선택, 즉 리 퀸젤이라는 외부 사건에 대한 아서-조커 개인의 감정과 반응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로맨스, 로맨스 코미디, 멜로 등 감정에 기반한 영화라면 개인의 감정과 반응에 집중한다고 해도 관객에게 감정이입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조커: 폴리 아 되>는 광기와 폭력의 상징인 조커라는 캐릭터에 기반한 <조커>의 후속작이라는 점이다.
전작에서 아서-조커는 사회의 혐오와 폭력에 고통 받는 가운데 사랑조차도 자신의 착각, 어머니의 거짓말, 관객과 사회자의 비웃음 등으로 부정 당한 인물이다. 그의 광기와 폭력이 정당하느냐의 도덕적 논쟁을 차치하고 보면 극단적인 사회 부적응자 아서-조커는 사회와 관계 속에서 등장한 개인이다. 흔히 말하듯 완전무결한 절대적 악이 아니라 어떤 이유가 존재하는 상대적 악인 것이다. 재밌게도 상대적 악인 아서-조커에게 관객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대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관객이 현실에서 겪는 삶과 물리적으로, 심정적으로 비슷하기에 이해와 공감의 대상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관객은 <조커>를 통해 아서-조커와 일종의 공범이 된 것과 같다. 관객은 상대적 악인 아서-조커가 부정한 도시 고담 시티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가상에서만이라도 그러한 현실이 실재화되길 바라고 이러한 실재화가 가능하기 위한 시발점이자 상징으로 아서-조커를 내세우고 대리 만족을 한 것이다.
출처. 왓챠피디아
하지만 공범이 된 관객의 바람과 달리 아서-조커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따라하는 대중을 보고 과장되게 웃으며 교도소에 갇힌 전작과 달리 <조커: 폴리 아 되>의 아서-조커는 그러한 관심이나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삶의 의지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그가 반응할 때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리 퀸젤과 관련되어 있을 때만이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관객과 공범인 아서-조커는 전작과 다르게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리 퀸젤의 마음을 사는 것에 집중해있다. 관객은 아서-조커가 전작에 이어 광기와 폭력으로 리 퀸젤과 함께 고담 시티를 정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조커는 리 퀸젤을 만나고는 그 관계를 완성한 평범한 삶을 원하다 결국 리 퀸젤조차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도소에서 쓸쓸하게 죽는 결말을 맞이한다. 일차적으로 이렇게 아서-조커가 광기와 폭력으로 부정한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허망하게 죽는 것에 대해 관객은 실망했을 것이다. 나아가 관객이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아서-조커를 향한 바람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넘어 현실에서 자신들이 느낀 분노 자체를 공감받지 못했다는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처. 왓챠피디아
<조커>에서 아서-조커와 관객이 맺은 관계는 흥미롭다. 관객은 아서-조커가 흔히 찌질한 루저라고 말하는 사회 부적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찌질한 루저 아서-조커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해 이른바 열폭한 것이 고담 시티를 파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아서-조커와 관객의 관계는 서로가 찌질한 루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커>는 아서-조커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동일한 혹은 비슷한 사회 부적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스크린을 통해서라도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공감해주는 영화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그러한 전작의 스탠스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다. 아서-조커와 관객의 연대 관계 이면에서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현실인 찌질한 루저라는 현실을 관객이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가장 극단적인 직면은 영화 상에서 아서-조커의 추종자들 중에는 '개리 퍼들스(리 길 분)'과 같은 비정상인은 한 명도 없고 겉은 정상인들이나 사회 중산층 이상 계층에서 밀려난 이들 뿐이라는 점이다. 분노한다고 해도 찌질한 루저라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찌질한 루저의 연대가 얼마나 깊이감 없이 무의미하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아무리 현실에 분노하더라도 그러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출처. 왓챠피디아
관객 입장에서 <조커>에서 자신과 맺은 관계를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완전히 뒤집어 엎는 모습은 억울하다는 감정과 배신감을 일으킨다. 관객이 <조커: 폴리 아 되>에 바란 것은 현실에 느끼는 분노를 위로해주는 영화였을 것이다. 특히 조커라는 인물에 대한 인상이나 인식은 코믹스 만이 아니라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시리즈,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무한도전의 조커 박(?) 등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광기와 폭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로 공유되고 있었다.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토드 필립스 감독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즉, <조커>는 관객 대다수가 공유하는 인식에 기반해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는 정당하다고, 그러한 분노를 품게 만든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관객의 인식을 향해 정신차리라는 듯 뒤통수를 친다. 조커라는 인물에 대한 관객의 인식을 이용했던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분노에 기반한 관계의 휘발성을 앞세워 관객과 맺은 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한다.애초부터 분노의 휘발성과 허망함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굳이 조커라는 인물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한 주제를 담은 서사를 새롭게 만들기는 어려우니 조커라는 대중적인 인물을 통해 편의적으로 관객과 관계를 맺고는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관객이 바라는 바대로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관객 맺은 관계에서 자신은 관련 없다는 듯 빠져나와 훈계하는 듯한 이 영화에게 배신감이 들지 않는 관객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