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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여우랄라 May 12. 2023

맛있는 유산(등갈비김치찜)

(오뚜기공모전 제출, 떨어쪘지만...)


  압력밥솥 가장 안쪽에 신 김치를 두둑이 깐다. 그리고 핏물을 뺀 등갈비를 그 위에 얹고 김칫국물과 약간의 물을 붓는다. 신 김치의 신맛을 제거하고 국물 맛을 돋우기 위해 설탕을 조금 넣고 압력밥솥 뚜껑을 덮는다.

센 불을 켜 솥의 온도를 높이고 압력추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면 약 불로 줄여 약 30분간 찐다. 20분쯤부터 고기와 김치가 푹 익으면서 달큼한 김치냄새가 올라와 코를 자극한다. 어린 시절, 나는 이때가 가장 괴로웠다. 냄새에 취해 빨리 달라고 보챘더랬다. 그러면 엄마는 ‘아직!’이라 하셨는데 나도 그 시절 엄마를 흉내 낸다. 제대로 된 맛을 보려면, 침을 그러모아 삼키며 10분은 더 참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음식의 즐거움은 등갈비를 입 속에 넣었을 때, 고기가 뼈에서 쏙 빠져나와 김치와 어우러지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음식의 손맛이란 것은 사실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손, 적당히 맛이 드는 시간을 기다리는 손이 만들어 낸 ‘시간의 맛’임을 이제는 안다.



  때마침 아이 친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집엔 아이들의 친구들이 자주 놀러 온다. 내 자식과 즐거이 지내는 친구들은 언제 봐도 반갑다. ‘어서 오라’는 인사말에도 미소가 베인다. 아이들이 손을 씻는 동안 등갈비 김치 찜을 커다란 오목 접시에 수북이 담아 식탁으로 가져갔다. 손을 씻고 식탁으로 오던 아이들이 ‘와~~맛있겠다! 한다.



“우리 엄마 음식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김치랑 등갈비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어.”

식탁에 앉으며 친구들에게 건네는 아이의 말 속에 자부심이 비친다.



  어릴 적 나도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데려 왔다. 집이라고 해봐야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대문도 없이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과 방이 고스란히 다 보이는 초라한 집인데도 나는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이 좋았고 하교 후 친구들과 나는 의례 것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 때는 가난이란 게 무엇인지 몰랐다. 내 주변에 모든 집들이 그렇게 살았기에 당연한 삶이라 여겼고 엄마의 간식이 있고 내 친구들을 언제나 즐거이 맞아주는 부모님이 있는 우리 집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하교 시간에 맞춰 간식을 하셨다. 어느 날은 도넛, 어느 날은 카스텔라, 어느 날은 시루떡. 하굣길 나를 맞이하는 건 늘 엄마가 만든 간식 냄새였다. 집에 다다를 때쯤부터 풍겨오는 그 냄새가 참 좋았다. 갓 만들어진 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 냄새에 취해 서둘러 문을 열면 친구들은 여지없이 ‘와~ 맛있겠다!’ 며 감탄했고 엄마가 건넨 간식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너희 엄마 요리 진짜 잘 하신다. 넌 좋겠다.’ 며 부러워했다. 요리는 나눔이며 베풂이라던데, 내게 엄마의 요리는 자랑이며 자부심이었다.



  엄마의 자랑과 자부심을 먹고 자라던 내가 스물일곱이 되었고 그 해 2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날이 잡히자 그 누구보다 엄마가 제일 바빴다. 먼저 딸을 결혼시킨 친구들에게 조언 구하랴 예산 짜랴 결혼 당사자인 나보다 엄마가 더 할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부엌살림은 본인이 직접 골라줘야 한다며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엄마는 주방용품 코너에서 각종 그릇들을 사기도 했지만, 주방 살림 하나 하나를 살피며 재질에 따른 용도와 음식에 맞는 그릇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날 엄마는 내가 보기엔 쓸 것 같지 않은 수많은 그릇과 냄비들을 사 주었고 집에 와서도 혹여나 빠진 설명이 있을까 싶어 ‘아 그리고 이건’으로 시작하는 설명들을 자꾸 자꾸 이어 갔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음식이 주는 고단함을, 음식이 만들어내는 생명과 변화를, 그리고 음식이 주는 기쁨을 말이다.



  그러나 결혼하는 게 마냥 좋기만 했던 나는 엄마의 긴 설명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릿속엔 오로지 예쁜 드레스와 화려한 화장, 해외로 떠나는 신혼여행 생각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나 철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던 날, 나는 그래서 더 많이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말간 얼굴을 하고 있던 뭣 모르던 내가 생각나서 말이다. 나에게서 ‘자식’이라는 생명체가 나를 닮은 얼굴을 하고 태어나던 후로, 나의 삶은 아이를 낳기 전과 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달라졌다. 나의 모든 초점은 그 생명을 온전히 기르고 성장시키는 일에 맞춰져 버렸고, 동시에 많은 순간 엄마를 떠올렸다. 하루에도 세끼, 아니 아이가 유아기일 때는 간식까지 꼬박 다섯 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 지난날의 엄마 모습을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듯 돌이켜 보았다. 특히 결혼 전 엄마가 부엌살림을 고르며 했던 말들을 떠 올려 보며 귀담아 듣지 않던 내 모습을 돌이켜 다시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어릴 적 엄마의 밥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치 엄마라는 자판기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듯 ‘엄마, 밥!’하면 따뜻한 밥을 뚝딱 차려주었기에 기계처럼 자동적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줄만 알았나 보다. 아이의 밥이 나의 몫으로 주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 많은 밥이 엄마의 가장 힘든 노동이었음을,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가장 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밥 덕에 제비 새끼마냥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엄마가 보내는 사랑의 눈빛에 눈 맞추는 것이 전부였던 꼬꼬마 아기가 온전한 사람이 되었고 또 한 생명의 어미가 되었음을 말이다.



  내가 하는 모든 밥엔 엄마의 맛이 새겨져 있나 보다. 남편은 종종 ‘장모님의 솜씨를 닮아 음식을 잘 한다’며 친구들 앞에서 나를 자랑 삼곤 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컸지만 여전히 하루에 두 끼의 밥을 한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하루의 두 번 이상은 엄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엄마의 음식을 그려본다. 어쩌면 사랑이란 그저 모든 엄마들의 재현인지 모르겠다. 엄마의 엄마, 그리고 또 그 엄마의 엄마를. 내 어릴 적보다 조금 더 편리해진 주방 살림과 더 튼튼해진 주방용품들을 사용한다는 것만 다를 뿐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등갈비 찜과 엄마가 즐겨해 주시던 간식들을 만들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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