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글몽글한 겨울

by 기욤하우어




눈발이 살짝 날리는 산속 오솔길. 하얀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낸 소리를 따라 한 여인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막연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지난 기억들을 되짚어보려 했지만, 발끝에 닿는 눈과 차가운 공기에 마음이 자꾸만 흩날렸다.


산 위 깊은 곳에서 은지가 길을 멈추자, 한 노인의 모습이 안갯속에서 나타났다. 산신령이었다. 오래된 나무 뒤에서 엿보듯 나타난 그는 은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은지야, 그대 마음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구나. 허허, 지나간 일들을 몽글몽글 떠올리며 그리워하는가 보구나.”


은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산신령님, 맞아요. 지나간 일이 자꾸 떠오르는데, 그때의 느낌을 따라가면 뭔가 놓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복잡해요.”


산신령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겨울바람을 막는 절벽이 뒤쪽에 난류를 만들듯, 그대 마음도 놓치고 싶은 기억과 붙잡고 싶은 기억이 뒤엉켜서 혼란스러워지는 법이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네. 바람은 결국 길을 찾고, 물길은 틀어진 자리를 스스로 조정하듯, 그대 마음도 서서히 균형을 찾아가게 마련일세.”


은지는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산신령님. 나는 나답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획에서 자꾸 벗어나고,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요.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산신령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은지 옆에 서더니, 흙과 낙엽을 밟는 소리를 천천히 즐기듯 말했다.


“허허, 금속이 열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전체 구조를 지탱하듯, 계획과 그대의 본성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일세. 계획을 벗어난다고 해서 그대가 틀린 것이 아니고, 계획대로 한다고 해서 그대가 온전히 살아가는 것도 아니지. 중요한 건 그대가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이네.”


은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계획에서 벗어난 지금의 나도 괜찮다는 거죠?”


산신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허허, 그렇네. 지금의 그대는 겨울 햇살에 녹는 눈처럼, 차갑지만 동시에 따뜻한 흐름을 품고 있네. 기억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그저 흘려보내면서도 마음속에 남는 감각을 느껴보게. 그래야 비로소 그대만의 몽글몽글한 추억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지.”


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밭 위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산신령님, 그럼 앞으로도 내가 길을 잃어버리거나 계획을 벗어나더라도, 그 자체로 나를 믿고 걸으면 되는 거군요.”


산신령은 엣헴 하고 웃으며 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바람만이 그 자리에 남아 은지의 머리칼을 살짝 스쳤다. 발끝은 여전히 시렸지만, 마음 한켠에는 묘하게 포근한 감각이 자리 잡았다.


길을 잃어도, 이리저리 흔들려도, 그것조차 나답게 살아가는 한 과정임을 은지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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