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초입에 있어 마을 앞으로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양옆으론 산맥이 꿈틀거리며 용트림하듯 서쪽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모습이 마치 70년대 후반 우리의 용대리를 연상케 하는, 괴상한 이름의 어느 스페인 시골 마을에 도착해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다. 한낯의 햇살이라곤 마치 토끼 꼬리처럼 짧게 남쪽 하늘에 잠시 떠 있다 산등성이 뒤로 냉큼 숨어 버려 낯선 사위는 이미 어둑하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스산하다 못해 냉기마저 품은 듯하다.
어김없이 때 맞춰 배는 출출해 오는데, 갑자기 서울의 뒷골목 한 모퉁이 손님들로 북적대는 포장마차 따끈한 김이 피어 오르는 어묵 국물, 얼큰한 소주 한잔에 떡볶이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감도는 감칠맛 따위가 눈앞에, 아니 입안에 삼삼하게 떠돈다. 나그네의 향수는 입맛이라는 형태로도 존재하는가 보다.
그런데 완죠니 100%인 국산 한국제 컵라면이 하룻밤 묵어 가기론 한 알베르게의 진열장에 위풍도 당당하게 빛을 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컵라면은 높은 산을 넘어온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호사였다. 어마무시하게 바가지가 씌워진 가격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 다만 컵라면을 맛있게 들기 위해선 끓는 물이 필수라는 사실도 모르는 듯한 그 사립 알베르게의 주인과 다소 신경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놈의 샤워실이 고장 나 더운물이 나오질 않고 라면만 비싸게 팔고 끓는 물은 줄 생각도 않던 알베르게 주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니, 지친 순례자는 바야흐로 냉수 샤워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여자 투숙객이 샤워실 앞에서 얼쩡 거리는 나를 보고 자기가 문 앞에서 지켜 줄 테니 여자 샤워실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투숙객도 몇 안되고 부지런한 여자들은 모두 샤워를 마친 것 같았다.
덕분에 더운물로 샤워를 하는 두 번째 호사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나는 5분 만에 샤워를 끝내 그녀를 감탄하게 해주는 기쁨을 덤으로 누렸으니 이 어찌 알베르게 주인인 호세의 덕이 아닐쏘냐? (사실 젊은 사관학교 후보생 시절 우리에게 주어진 샤워 시간은 무려 1분이었으니 5분 동안의 샤워는 정말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순례길의 모든 것을 그냥 아름답게만 바라보는 시각을 조심해야 한다. 길고 험한 순례길 곳곳에는 산도적과 맹수들이 들끓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타당할지 모른다.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것, 그것이 순례의 목적이다.
다음날, 나의 목적지는 해발 1300미터에 위치한 O Cebreiro다. 다소 쌀쌀하지만 줄곧 평평한 길을 달려 Villfranca del Bierzo라는 긴 이름의 마을에 도착해 가게에서 산 치즈와 빵 그리고 과일 하나로 점심을 대신했다. 도대체 얘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선, 왜! Why? 2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시간이 나서 마을의 안내소에서 지도를 하나 얻었다. 옛날 사람인가? 나는 휴대폰 지도보다 종이지도가 아직도 더 좋고 편하다. 종이 지도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그런데 지도를 내주던 분이 혹시 한국 사람 아니냐 물으며 얼마 전에 그 마을에 한국 배우들이 와서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일종의 리얼리티 쇼우 촬영을 하고 갔다고 장소를 일러 준다. 해서 촬영 장소에 가 보니 과연 화면에서 보던 그대로이다. 다만, 이제는 영업을 접었는지 육중한 철제문이 닫혀 있어 다소 쓸쓸한 느낌이 든다. 혹시 그곳에서 한국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일말의 기대도 했었는데....
산꼭대기로 오르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어제도 높은 산을 오르느라 체력이 바닥인데 오늘도 또 1300여 미터의 높은 산을 올라야 하니 몸과 맘이 천근만근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정에 맞추려면 오늘의 목적지까지는 가야 한다.
힘들 때마다 내려다본 저 아래 풍광은 정말 아름답다. 계곡은 구름에 덮여 있고 산 봉우리는 구름 위로 솟아나 자기 혼자 지는 해에 일광욕을 즐긴다. 바람결엔 개 짖는 소리, 새 우는 소리가 간혹 불어오고 쉴 때마다 추위는 엄습해 온다. 이렇듯 끊임없이 오를 땐 지도상의 거리가 무의미해진다. 거리는 참고사항일 뿐 계속 자신을 달래고 격려해야 한다.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O Cebreiro 산꼭대기에 오르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마을의 개들은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경계심을 잃은 듯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닌다. 고군분투하며 오르던 나의 조금 전 모습이 무색할 뿐이고 무용담을 털어 놓기엔 그들의 무용담도 만만치 않다.
공립 알베르게에 자전거를 묶고 여장을 풀었다. 산이 높아 바람이 세게 부는가? 그곳 건물들은 어쩐지 몸을 낮추고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아주 단단한 지붕을 하고 말이다.... 벽은 돌로 만들어져 있고... 하기야 유럽의 건물 중 돌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있을까마는 어쨌든 보는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겠지.
O Cebreiro 산 꼭대기에 있는 건물들
O Cebreiro 산 꼭대기에는 두세 개의 알베르게 겸 식당, 기념품도 파는 곳이 있고 식품과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달걀을 낱개로도 판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6개 묶음이 최소 판매 단위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다 사서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한 개씩도 파니 짐이 가벼워야 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 수었다. 가격도 합리적이니 아마도 공립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난밤 그곳과 비교된다.
방을 배정받고 들어가 보니 온통 한국 사람들이다. 아니 오직 한국 사람만 수십 명이다. 알고 보니 가톨릭 단체 여행객들이라 한다. 전국 각지에서 오신 분들이다. 관광 가이드가 두 명인가 따라붙고, 신부도 둘이나 동행하며, 숙소와 숙소 사이는 차가 와서 짐을 실어 옮기고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만 챙겨 가볍게 움직인다고 한다. 숙소도 미리 예약된 상태이고....
자전거 솔로 여행을 하는 날 보고 신기하다는 반응들이다. 솔직히 나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산꼭대기의 밤은 춥다. 창문엔 수증기가 짙게 서려 물방울이 맺히고 창밖은 암흑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아침 살짝 영하로 떨어진단다. 침낭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곧 통나무처럼 잠에 빠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