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전을 부치다 보낸 카톡 "더는 못 있겠어"

by 제제

냉장고 손잡이를 부여잡고 터뜨린 나의 대성통곡은, 나정식에게는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그는 놀라서 눈만 끔벅일 뿐,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여보, 왜 울어?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엄마가 정리해 주신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깔끔해졌잖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절망감을 배가시켰다. 깔끔해졌다고? 나는 "이탈리아 캐리어"도 못 풀고, 밤샘 프로젝트를 하다 달려왔는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공간이 침범당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정리'라는 결과만 볼 뿐, 그 속에 담긴 나의 무력감과 존중받지 못한 감정을 전혀 읽지 못했다.
​"정식아, 이건 깔끔하고 안 깔끔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왜 내 허락도 없이! 내 공간을! 이건 우리 결혼생활이야. 왜 어머니가... 왜 당신은 그걸 그냥 두는데?"
​나는 울면서 소리쳤지만, 정식은 여전히 동공 지진 상태였다. "아니, 엄마가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신 거지. 그걸 가지고 이렇게 울어? 결혼하면 엄마가 딸 도와주듯 도와줄 수도 있지."
​우리의 결혼 후 첫 번째 심각한 갈등은 '공간 침범'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도와주신 거지'라는 순진한 대답은, 나의 절규가 그에게는 그저 '별것 아닌 일로 유난 떠는 아내의 히스테리'로 치부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결국 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한밤중에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냉장고와 살림 정리, 그리고 정식의 반응을 하소연했다.
​"엄마... 나 결혼 왜 했지? 엄마 말대로 눈 멀었나 봐. 나 이대로는 못 살겠어."
​엄마는 속상해하는 목소리였지만, 결국 나를 다독였다. "아이고 한여름아. 네 마음이야 오죽할까. 네가 똑 부러지게 살아서 네 방식이 있는 거 알지. 근데 시어머니는 나이가 있으셔서 그렇지, 네 편 되려고 노력하시는 거야. 우리 딸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니. 네가 현명하게... 잘 지내보려고 노력해야지."
​친정엄마의 말은 따뜻했지만, 결국 나에게는 '결혼을 한 이상, 네가 참아라'는 사회의 무거운 숙제처럼 들렸다. 나의 고통은 사적인 투정으로 치부되었고, 나는 다시 홀로 외로워졌다.

​며칠 후, 나는 달력을 보고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구정 연휴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불과 한 달 전 크리스마스에 그 난리를 치렀는데, 명절이라니! 나는 KTX 티켓을 예매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명절 연휴, 나는 불안감 속에 시댁에 도착했고, 눈앞에는 명절 음식 준비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주버님과 나정식이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자,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은 오히려 정식을 내보냈다. 시어머니마저 이웃집 호출로 잠시 집을 비우자, 낯선 시댁 주방에는 나 홀로 남았다.

​내 앞에는 밀가루 반죽부터 시작해야 할 전 재료들이 끝없이 놓여 있었다. 동그랑땡, 두부전, 배추전, 육전… 전은 왜 이리 종류가 많은가. 뜨거운 기름 냄새와 지글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주방에서, 나는 타들어 가는 전만큼이나 나의 영혼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럴려고 그 험한 취업 전쟁을 치렀나? 내가 이럴려고 이탈리아 캐리어도 못 풀고 중국 출장을 다녀왔나? 나정식의 아내이기 이전에, 나는 회사에서 '일잘러'였는데, 여기서는 '명절 음식을 하는 하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배추전을 뒤집던 내 손이 멈췄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절망감과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이 상황을 '현명하게' 버텨낼 힘이 없었다. 나는 기름때 묻은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외출 중인 나정식에게 다급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나정식, 나 도저히 못 있겠어. 전 다 못 부쳐도 상관없으니까 나 지금 갈게. 도저히 못 버티겠어.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나정식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나에게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주방으로 달려 들어오는 시어머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정식에게 전화를 받은 아주버님과, 시아버님, 그리고 시어머니까지 모두 황급히 집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초저녁, 온 가족이 모였지만 집안 공기는 숨 막힐 듯 차가웠다. 나는 주방 구석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가족들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나는 갑작스럽게 혼란에 빠졌다.

​'내가 문제인가? 내가 너무 유난인가? 다들 이렇게 명절을 보내는데, 나만 유난히 힘들어하는 건가?'

​억지로 울음을 참아냈던 냉장고 사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내가 가족 전체의 평화를 깬 장본인이 되었다는 죄책감과 혼란만이 나를 괴롭혔다.

​다음 날 아침,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정 차례와 성묘를 마쳤다. 나는 그 차가운 집에서 겨우 하룻밤을 견뎌냈다.

​서울로 올라가는 KTX 안, 나와 나정식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정식아. 나도 노력했어. 잔치상에서 어머니 말씀 듣고, 마트 김치 때문에 울었을 때도 내가 현명하게 참고 넘어가려고 했어. 근데 어제 명절 주방에 나 혼자 남겨졌을 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정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우리 집에서 귀하게 자란 외동딸이야. 그 집의 일잘러인 나에게, 이 결혼은 당신을 위한 봉사가 아니야. 우리 결혼 생활에서 시댁 일은 부부가 같이 하는 게 맞잖아."

​나의 단호한 말에 나정식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눈빛에 긴장과 불안감이 역력했다.

​"여보,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내가 그냥 나간 건 정말 잘못했어. 내가 뭘 도와줄지 몰라서 그랬어."

​그는 황급히 사과했지만, 그 사과가 진심으로 나의 고통을 이해해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파혼이 두려워 불안감에 내뱉는 말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통보를 했다.

​"우리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오늘 서울에 도착하면, 우리 부모님께 명절 인사드리러 갈 거잖아. 거기서 이 모든 이야기 다 말씀드리고 결판내자. 나도 우리 집 귀한 자식으로서, 이 결혼을 어떻게 할지 다시 결정해야겠어."

​정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KTX는 굉음을 내며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나의 결혼 프로젝트는 이제 '결판'이라는 최후의 스테이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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