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람들
아무리 기어내려가도 내 유년의 뜰은 왕십리 마당에서 멈춘다. 내가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거나 거기서 네 살까지 살았다는 사실은 아버지 말에서나 존재한다. 내 기억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여 내 양심은 내게 말한다. 네 고향은 왕십리의 그 마당 넓은 집이라고. 마당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살던 일여덟 가구의 이웃들에 대한 기억 덕분에 나는 서울이 고향 같다. 네 살때부터 만난 그 이웃들은 가물하다. 양우네, 춘자네, 춘연이네, 가겟방, 무당 아줌마네, 과외선생님네 정도의 이름만이 내가 기억하는 이웃의 전부다. 그러나 그 집과 마당을 떠올릴 때면 배꼽 아래서부터 더운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여로’였다. 포털 사이트로 검색해 보니 이 연속극은 1972년 4월 3일부터 12월 29일까지 KBS에서 방영했다. 이 연속극을 나는 마당에서 이웃들과 같이 봤다. 연속극을 할 시간이 되면 주인집 할머니는 ‘테레비’를 마루로 내고 마당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서둘러 저녁밥을 먹은 셋집의 문들은 빠끔빠끔 열렸다. 열린 문들에서는 어른과 애들이 나왔다. 이윽고 마당은 흥성대는 이웃들로 부풀어올랐다. 한집에 사는 이웃뿐 아니라 앞옆집 뒷집 이웃들도 모인지라 초등학교 2학년생인 나는 할 수 있는 한 몸을 웅크려야 했을 거다. 얼굴보다는 “색시야 색시야.”하는 배우 장욱제의 혀 짧은 소리가 선명하게 기억 나는 걸 보니 어린 나는 어른들에 묻혀서일망정 기어코 연속극을 보고야 말겠다 했나 보다.
흑백 사진 하나가 그 때의 내 이웃을 전한다. 나는 이삼 학년쯤 됐으려나. 주인집 할머니는 팔 하나를 괴고 마루에 길게 누운 채 툇마루에 쪼르르 앉은 세 명과 눈맞춤을 하고 있다. 나는 세 명 중 하나로 그 마루의 끝에 앉아 있고 내 옆에는 주인집 언니 둘이 앉아 있다. 사진에는 없는 주인집 막내 아들 양우 오빠는 나한테 어지간히 짓궂었다. 그게 괴로워 엉엉 울라치면 이웃들은 그랬다. 양우 오빠가 내 신랑이 되고 싶어서 그런다고.
나는 주인집 공간을 쓱쓱 넘나들었던 듯하다. 7년여를 산 내 집의 단칸방은 도대체가 생각이 안 나도 주인집 마루며 방들은 어렴풋이 생각날 것 같은 느낌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내게도 유년의 뜰이 있었다는 안도감을 누린다. 이렇다 할 유년 시절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고 슬펐는데 사진 하나가 나를 구제한다. 셋방 계집애가 그렇게 떳떳이 주인집을 차지했으니 유년이 가난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다.
춘연이는 내 밑의 남동생과 동갑이었다. 네 살 어린 그 아이는 우리가 자양동으로 이사 가서도 우리랑 어울렸다. 나는 전학을 가는 게 무서워서 5학년 때부터 자양동 그 먼 데서 만원 버스를 타고 동명국민학교를 다녔고, 동생은 누나랑 같이 다닌다고 1학년 때부터 나랑 같이 학교를 다녔다. 춘연이는 그런 우리 남매랑 학교에서 만나서 학교가 끝나면 같이 놀았다. 서로 정 떼기가 그렇게 어려웠었나 보다. 춘자 언니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만났던 거 같다. 모녀만 살았던 언니네 역시 다른 데로 이사를 갔는데 나는 그 집에도 놀러 갔던 거 같다. 과외선생님하고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만났다. 부산의 어느 고등학교 교장의 첩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과외선생님은 나보다 두 살 많은 딸 하나랑 살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그 언니를 친언니로 여겼다.
얼마나 그 집이 그리웠으면 나는 5학년 때 거기서 한참 떨어진 자양동이라는 동네로 이사한 뒤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 집 꿈을 꿨다. 자양동에 도로와 한강을 잇는 굴이 하나 있었는데 꿈에서 내가 그 굴을 지나면 그 끝에 영락없이 마당 넓은 그 집이 나오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도 꿈인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는 뭐에 홀린 애마냥 자꾸 그 굴에 갔다. 그 집에 모였던 이웃들이 만들어낸 냄새나 촉감에 목말랐던 듯싶다. 그러나 굴 끝에서 내가 만나는 땅은 어김없이 한강 둔치였다. 그 때마다 한여름 낮잠의 끝처럼 허탈했다.
감쪽같이 사라진 이웃을 대신할 어떤 것도 갖지 못해서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꿈을 꾸었나 보다. 만났다 헤어지는 아픔을 탄식한 말로서 나는 중국 시인 백낙천의 ‘비파행’에 나온다는 구절만한 걸 못 봤다.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會相識’. 번역문이 기막히다.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이 구절이 내 상실감을 대변해 줄 만큼 내 유년의 이웃은 그 이후 만난 이웃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인다.
이렇게 애절한 이웃을 놓고 아버지랑 얘길 나눈 적이 있다. 아버지 얘길 듣고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증언에 따르면 주인집은 우리와 악연이었다. 엄마는 평생을 숨어서 담배를 피웠는데, 그래서 폐암으로 우리 곁을 일찍 떠났는데, 엄마한테 담배를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주인집 할머니였다는 것이다. 셋째를 임신하여 입덧으로 괴로워하는 엄마한테 할머니는 자신이 피우는 담배를 치료책이랍시고 가르쳐 줬다고 한다. 게다가 주인집 내외가 어수룩한 엄마를 꾀어 빌려가 놓고 갚지 않은 돈이 그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라는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이웃이라는 인연의 실은 미덕과 악덕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