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없다.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도 한 기억도.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면 자기 발전에 유용하다는 류의 말을 책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 참에 존경하는 인물을 생각해 본 적 역시 없다.
글쓰는 모임에서 글제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 반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이제 그 사람이 있기로소니 발전을 하면 얼마나 할까 냉소했지만 숙제니까 생각해야 했다. 산 사람 죽은 사람, 실제 사람 가상의 사람, 아는 사람 얕게 아는 사람으로 이리저리 나눠 가며 찾았다.
영화 속 인물까지 내려갔다. 영화 ‘선택’을 보고 알게 된, 세계 최장기 양심수인 김선명 선생이 떠올랐다. 그리고 책으로 알게 된, 우리 시대 논객인 신영복 선생도 탄광촌 초등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임길택 선생도 떠올랐다.
직접 만난 사람 중에서는 정말 없나?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겪은 사람이었다. 나도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도 나를 알았다. 쉰다섯에 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 사람이 경험한 집은 단칸 셋방뿐이었다. 자식 셋과 가게에 고용된 전기 기사의 세 끼 밥도 모자라 재수한다고 올라온 시댁 조카 밥까지 해 내면서 신세 타령이 없었다. 연탄불 아닌 난방을 경험하지 못했고 양변기는 병원에서 처음 써 봤다. 전파사 가게를 지키면서 자잘한 물건 값을 외우지 못해 돈을 덜 받거나 셈이 어두워 거스름돈을 많이 내 준 날은 곧 닥칠 남편의 비난이 무서워 속을 태웠다. 자식에게 마음을 터 놓은 일도 자식한테 위로를 받은 일도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이 생의 목표라든가 희망을 입에 올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살아갈 뿐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시지프스의 현신처럼 보였다. 돌덩이를 밀어 올리고 내려오면 또 올리고. 그 돌이 남보다 무겁다느니 언덕이 더 가파르다느니 불평할 줄도 몰랐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누워 지내면서도 지나온 생을 탄식하지도 남편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당부한 것은 네 아버지를 외롭게 하지 말라는 것, 그게 다였다.
그 사람이 이승을 떠난 지 올해로 21년째다. 내년이면 나도 그 사람의 마지막 나이였던 쉰다섯이 된다. 작년부터 그 사실이 의식됐다. 손가락 관절염이 시작되면서 부엌에서 그릇을 떨쳤다. 고추장을 푸던 숟가락을 놓치고 유리컵이 미끄러져 나가고 마늘을 찧던 칼을 떨어트렸다. 앉았다 일어날 때면 두 손이 양무릎에 가 있었다. 낯익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그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되어 있는 나를 느끼면서야 그 사람이 달리 해석됐다. 밥그릇을 떨구고 참기름병을 놓쳤던 그 사람은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라 환자였던 것이다. 다리가 나무 토막 같다고 말했을 때에는 통증이 어지간했던 거였다. 사람이 어수룩해서 고통을 입 밖에 낼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삶을 선택한 거였다. 희망을 품을 줄 몰랐던 게 아니라 주어진 삶 말고는 눈길을 주지 않은 거였다. 무심하고 무정한 남편과 자식을 원망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자신 삶의 책임을 지우는 법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말했다. 한 인격에 대한 존경은 그가 실현하고 있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라고. 사람은 본디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는 바, 한 인격이 존경 받을 만하다는 것은 그 충동과 경향성을 거부하여 자기애와 자만을 끊어냈기 때문이요, 도덕법칙은 이런 때에 생겨난다고 했다. 따라서 이것이 없는 사람은, 이것이 있는 사람을 볼 때 우선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즈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지니는 감정이 존경인 것이 맞다. 자기애가 들끓어 욕망의 그릇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가 이 나이가 되어 육체의 한계를 느끼면서 내가 보이는 모습은 그 사람과 대조적이다. 여태도 편치 않았건만 난데없는 불행까지 닥친 이게 뭐냐고 투덜대고 아무 데 아무에게나 틈만 나면 동정을 구하는 나와는 달리 그 사람한테서는 ‘자기애’가 없었다. 그 사람은 욕망을 등지고 의지를 세워 묵묵히 자신의 사막을 걷는 낙타와 같았다. 이제 와서야 그 사람이 실현한 도덕법칙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나는 내 자만이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람은 내가 답답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어야 했다.
존경은 처음에는 언제나 자기낮춤의 의식으로서 발생한다는 말 역시 칸트가 했다. 자기비하의 불쾌로 인해 생명력이 저지되었다가 자기 고양(高揚)의 쾌로 이어지는 것이 존경이라는 감정이고, 뛰어난 사람에 대한 존경을 통해 우리는 도덕법칙 자체에 대한 존경으로 이끌려가는 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 뒤 인간은 스스로 세운 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말로 이해되는, 소위 ‘순수실천이성’의 철학은 나를 격려한다.
나는 존경할 그 사람을 가져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 뒤를 밀다가 스르르 손을 놓아 저 혼자 갈 수 있게 해 주는 아비처럼 그 사람은 나를 도우려나 보다. 내 방향성에 단 한 번도 시비 걸지 않았던 그 사람이 죽어서 나를 이끈다. 그 사람과 같이 했던 시간에 그 사람을 존경할 기회를, 나는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