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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재미 Aug 05. 2024

느린 학습자들에게 읽는 기쁨과 대화의 기쁨을 선물하다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 전문기관 '피치마켓'

1. 피치마켓의 뜻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균등한 정보를 공유하며 양질의 제품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시장을 말합니다. 정보 비대칭이 심해 주로 저품질의 상품이 거래되는 ‘레몬마켓’의 반대 개념이죠.
"저는 콘텐츠 업계에도 피치마켓을 만들고 싶어요. 정보 격차 없는 세상을 꿈꾸죠."
2014년, 함의영 대표는 정보 격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 전문기관 피치마켓을 만듭니다. 피치마켓은 느린 학습자를 위해 책도 만들고, 교육도 하고, 도서관도 만들고, 기업과 손잡고 사용하는 설명서도 만듭니다.


2. '느린 학습자' 이 말이 낯선 분도 있으실 겁니다. 최근에는 '경계선 지능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분위기예요. 하지만 피치마켓은 2014년부터 이 표현을 써왔어요. 발달장애인과 경계선 지능인 모두를 포용해 느린 학습자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방점을 찍는 건 ‘느린’이 아니라 ‘학습자’ 예요. 많은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이나 경계선 지능인은 학습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어요. 아닙니다. 저희가 경험해 본 바로는 충분히 학습 가능해요. 적정한 콘텐츠와 교육이 있다면 말이죠.그래서 ‘느린 학습자’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속도는 조금 느릴지언정 배울 수 있다는 걸 알리려고."


3. 2014년 피치마켓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책을 만드는 거였어요. 계기가 있었어요. 당시 나가던 글쓰기 모임이 있었는데, 한 멤버의 동생분이 발달장애인이었죠. 그런데 그분이 그러는 거예요. 동생이 성인이 되고 나니 마땅히 읽을 책이 없더라고. 그렇게 동생이 책을 읽지 않게 되자 교육받을 기회는 더욱 줄었고, 정보 격차는 더 커졌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먼저 책부터 만들어 보자 싶었어요. 그렇게 만든 첫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어요. 실패한 책이었어요.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이해 없이 섣부르게 덤벼든 탓이었죠.


4. 망한 책을 들고 서울의 한 특수학급을 찾아갔어요. 먼저 느린 학습자에 대해 배우자고 생각했죠. 무턱대고 "학생으로 받아달라"라고 했습니다. 피치마켓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흔쾌히 승낙해 주셨고, 반 아이들에게 저를 전학생으로 소개해주셨어요.
제가 그 학교를 다닌 1년간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매일 글쓰기 숙제를 내셨어요. 그리곤 그 숙제를 다 걷어다 저한테 주셨죠. 이상하더군요. 분명 대화할 땐 말을 잘하던 친구도, 글로는 그만큼 못 쓰는 거예요.
덕분에 첫 책이 왜 실패했는지 알았어요. 말만 쉽게 고쳐 쓴다고 되는 게 아닌 거예요. 전개가 쉬워야죠. 그때부터 책을 새로 쓰다시피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5. '빨간 머리 앤'을 사례로 들어 볼게요.
"브라이트 리버역, 가지런히 쌓아 올린 널빤지 위에 머리카락이 빨간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빨간 머리 앤을 소개하는 장면이에요. 보통은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어요. 이걸 피치마켓은 1인칭으로 바꿨어요.

"내 이름은  앤이야. 내 머리카락은 빨간색이지. 나는 빨간 머리가 정말 싫어. 사람들은 빨간 머리 아이를 좋아하지 않거든."
그림책은 한 페이지당 글자수에 제한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비교적 적은 글자수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느린 학습자들을 몰입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주인공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으로 써보자고 생각했죠. 그랬더니 실제로 느린 학습자들이 보다 쉽게 몰입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가급적 이야기 전개는 시간 순서대로 해요. 문장은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쓰죠.
초고는 지적 장애인과 발달 장애인한테 감수받아요. 술술 읽히는지, 내용은 잘 이해되는지를 확인해요. 피드백에 따라 30~40번도 퇴고합니다.  


6. 책은 내용물만 중요한 게 아니죠. 다들 멋진 표지에 꽂혀서 책을 구매하곤 하잖아요. 피치마켓 책도 마찬가지로 디자인에도 신경 씁니다.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하나는 책의 두께가 어느 정도 볼륨감이 있을 것. 책이 두꺼운 만큼 다 읽고 났을 때 뿌듯함도 더 크리라 생각했어요.

또 표지는 어려운 책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요. '발달장애인', '느린 학습자', '쉬운 책'같은 문구도 넣지 않죠.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해서 최대한 그럴듯하고 있어 보이게 표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7. 폰트 역시 중요합니다. 피치마켓은 굳이 서체를 자체 개발했어요. 어떻게 하면 느린 학습자 독자의 가독성을 높일까 고민했어요. 자폐인, 발달장애인, 경계선 지능인 60명을 대상으로 눈동자의 흐름을 읽는 아이 트래킹을 했습니다. 문장을 읽히고 어떤 글자가 나왔을 때 막히는지 관찰한 것이죠. 줄, 간격, 자간, 글자 등. 그렇게 6개월 동안 연구한 끝에 피치마켓체를 만들었어요. 운 좋게도 이 서체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어요.

8. 여기까지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피치마켓이 만드는 책이 궁금하시겠죠? 혜화역에 있는 '라이브러리 피치'로 오시면 됩니다. 당부드릴 게 있어요. 저희 도서관은 좀 시끄럽습니다. 느린 학습자들은 기분이 좋아지면 소리도 커지고, 말도 많이 해요. 처음엔 기존 도서관들과 제휴를 맺고 우리 책들을 비치했어요. 그런데 책을 찾아간 느린 학습자들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쫓겨나곤 했죠. 이럴 바엔 도서관을 만들자고 생각했고, 도서문화재단 씨앗과 힘을 합쳐 2023년 '라이브러리 피치'를 열었어요.


9. 시끄러운 것 외에 한 가지 당부사항이 더 있어요. 계단석에 사람들이 누워 있어도 놀라거나 항의하지 마세요. 느린 학습자, 특히 자폐를 가진 분들은 바닥에 그냥 눕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래서 계단석 일부에 아예 매트리스를 시공했어요. 폭신한 쿠션도 가져다 놓고, 신발을 벗고 편하게 눕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죠.
저는 느린 학습자들이 저희 도서관에 평생 와주길 바라지는 않아요. 그냥 세상과 소통하는 데, 딱 징검다리 역할만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도서관이 익숙해지면 그다음은 집 앞 도서관도 용기 내 가볼 수 있지 않겠어요?


10. 피치마켓 책으로 40년 만에 처음 독서를 한 분이, 저희한테 편지를 써주셨는데, 가장 마지막 문장이 저에게 너무 큰 울림이 됐어요.
'책을 읽고 엄마랑 대화를 했다'
그분이 읽은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는데, 그 책에는 어느 날 천사가 날개가 부러져 지상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엄마, 천사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왜 안 죽어요?"
지금껏 두 모녀는 '잘 잤니', '밥 먹었니', '빨리 자라'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만 해오셨대요. 그런데 딸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질문거리가 생겨난 거죠.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서로 생각도 공유하고. 점점 대화에 새로운 주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분들이 계시니, 저는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 원문 바로가기

롱블랙 다큐, 피치마켓 : 느린 학습자도 톨스토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longblack.co)




11.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기쁨 중에,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기쁨은 단연코 '읽는 기쁨'과 '대화하는 기쁨'이다. 나는 일상에서 좋은 글을 읽고  떠오르는 질문이나 인상 깊은 문장들을 함께 나눌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12.'읽는 기쁨'과 '대화의 기쁨', 내가 누리는 두 가지 기쁨이 특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원한다면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느린 학습자와 피치마켓에 대해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13. 함의영 대표는 '읽는 기쁨', '대화의 기쁨'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14년 피치마켓을 설립한다. 그리고 '발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정보가 일치하는 사회를 이룬다'는 미션을 품고, '느린 학습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한다.


13. 그가 자신의 꿈에 얼마나 진심 인가 하면, 느린 학습자의 시선에서 책을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특수학교에 출석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느린 학습자들이 읽는 과정에서 겪는 불편을 줄여주기 위해 피치마켓 글씨체도 개발하고, 마음껏 눕고 떠들 수 있는 도서관 '피치 라이브러리'도 오픈한다. 한마디로 지독하리 만치 사용자 경험에 집중했는대, 피치마켓이 지금처럼 열일을 해준다면 느린 학습자들도 다른 이들과 같은 토대 위에서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게 된다.


14. 요즘 스레드, 인스타, 블라인드 같은 SNS를 열면 온통 '돈' 얘기로 가득하다. 어떠한 행위에 값을 매기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 세상, 이를 테면, '이게 돈이 돼?', '얼마나 버는대?' 이런 질문들이 스스럼없이 오가고, ' 벌 수 있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관심을 는 글들이 넘쳐난다. 나 역시 그쪽으로 눈길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돈' 그 한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치(Value)의 가치를 게 만드는 것 같아 아쉬울 때도 있다. 이를 테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이타심',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서 몰입하고자 하는 '열정', '배움', '성장', '재미', '사랑'과 같은 가치들. 당장의 돈으로 환산할 순 없지만 그 자체로 각자에게 고귀하고 가장 의미 있었던 것들. 나 조차도 내 삶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했는지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피치마켓과 함의영 대표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15. 나는 이왕이면 자신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꽂혀서 몰입는 이들이,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며 세상을 이롭만드는 조직이  잘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피치마켓의 스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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