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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Jul 18. 2022

<쓰리 빌보드> 분노의 시대에 우리는

#6 마틴 맥도나, 쓰리 빌보드(2017)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냉정하다 못해 메마르게 느껴지는 표정의 밀드레드를 중심으로 감정과 사건들이 엉킨다.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듯한 일련의 사건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결고리가 느슨하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듯한 에빙(ebbing) 시(市)에는 선연한 분노가 차오르고, 분노는 이내 불길처럼 사방으로 번져간다. 하지만 감정의 소요(騷擾)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대는 분노를 어느 정도는 조절해준다. 비이성적인 세계와 무분별한 분노, 느슨하지만 끊임없는 연대가 이루는 균형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는 세 개의 광고판(Three Billboards)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딸의 사건을 밝혀내지 못하는 경찰을 비판하는 광고를 게재한다. 이에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와 딕슨(샘 록웰)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은 광고를 내리기 위해, 그녀를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하고 괴롭힌다. 밀드레드와 윌러비 서장의 대립항으로 시작된 영화는, 몇 가지 뜻밖의 사건들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된다.

윌러비(우디 해럴슨)와 딕슨(샘 록웰)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그렇게 부조리한

<쓰리 빌보드>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서 영화 <파고>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두 작품으로 모두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는 점, <파고>에서 경찰서장을 연기했던 그녀가 <쓰리 빌보드>에서는 경찰서장을 비판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 등의 소소한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는 차치하더라도, 영화가 저변에 ‘부조리’의 상태를 짙게 놓아두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거대한 세계가 철저한 무신경의 태도로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려 무던히 애쓴다. 세계 내에 던져진 실존의 '부재하는 존재 이유'와 그 부재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불굴의 이성'이 공존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숙명적인 간극이 ‘부조리’를 낳는다."   

영화 <파고>

<파고>의 장엄하게 펼쳐진 하얀 눈밭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너무나 보잘것없이 느껴지게 하고, 무심한 세계 앞에 인간의 발버둥은 가히 안쓰럽게 느껴진다. <파고>의  납치범들피해자를 납치하고 돈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찰과 유족의 죽음에는 덧없는 우연성이 만연하고,  사건을 목격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살육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

영화 <파고>의 한 장면


불가해한 세계, 불완전한 이성

쓰리 빌보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왈라비 서장이 자살한 것은 맥도먼드가 쓰리 빌보드를 세웠기 때문인가? 딕슨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의 옆자리에 우연히 앉는 것은 정의 구현의 단초일까? 제임스(피터 딘클리지)가 불에 휩싸인 딕슨을 구하는 것은 사회적 연대에 대한 희구일까?


들어보자. 왈리비 서장 자살은 그 인과관계를 따져 보면 밀드레드 때문이 아닌 ‘오스카 와일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살하기 전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을 되뇌던 왈라비 서장은, 앞으로 예견된 병마로 얼룩진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하는 대신,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적 사고처럼)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유지한 채 주체적이고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생의 마감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가설이 터무니없이 느껴질 수 있지만, 부조리의 세계에서 자살의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공허한 작업이기에, 역설적으로 터무니없는 가설도 설득력을 가진다.

왈라비 서장의 죽음은 의도가 불명확한 세계의 파편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  죽음의 원인을 알기 어렵다. 서장의 죽음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음을 상정하고, 어떠한 이유를 붙이는 건 그저 인간들의 불완전한 ‘이성’이다.  

밀드레드가 일하는 가게의 모형과 인형들처럼, 일련의 사건들과 개체들은 명확한 의도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무심한 세계처럼 그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사건에 의도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모형에 가격을 붙이고, 인형을 던져 깨뜨리는 인간일 뿐이다.     



분노의 시대에 사회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불길이 의도를 가지고 옮겨 붙지 않듯이, 에빙 시에 퍼져 있는 분노는 당한 목표가 없이 사방으로 번져간다. 밀드레드로 인해 촉발된 분노는, 세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듯이, 비이성적으로 뻗어나간다.


이때 일시적으로나마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약자들의 연대’다. 영화 전반에 걸쳐 동성애자, 흑인, 소인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언행이 만연한데, 오히려 소수자들의 연대와 협력이 전소(全燒)될 한 에빙 시를 사회로써 기능케 한다.      

연대는 불타버린 빌보드를 복원하는 장면에서 가시화되는데. 배경인 미국 남부의 차별의 주요 대상인 흑인과 소인 등 결핍되고 소외된 사회의 일원들은, 백인 남성인 밀드레드의 전 남편이 저지른 무책임한 방화의 결과를 복구해 낸다. 복원의 장면에서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냥 희망적이고 따뜻하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 연대의 고리가 상당히 느슨하다는 것이다. <쓰리 빌보드>의 인물들은 서로를 돕다가도 갈등에 빠지고 갈등을 겪다가도 서로를 돕는다. 타인과의 연대를 무조건적으로 그리지 않은 감독의 시선은 막연한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보다 적확하게 고증한다.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와 제임스(피터 딘클리지)

딕슨과 밀드레드의 분노로 엮이었던 관계가 서서히 풀어지는 것과 밀드레드와 제임스의 우호적인 관계에도 갈등이 생기는 것 등에서 미루어 보건대,

분노도 연대도 영원히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것이다.


 ebbing(썰물) 시를 둘러싼 분노와, 느슨하지만 연대로 빚어진 화합은 밀물과 썰물처럼 균형을 이루며 사회를 유지시킨다. 무신경한 세계 속에 인간은 어떠한 이유로든 분노하고, 분노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번져간대도, 끈끈하지는 않지만 끊어지지는 않는 사회적 연대로써,

우리는 불안한 사회를 계속해서 존재케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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