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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Jul 11. 2022

얼마예요, 당신?

#4 이충현, 몸 값(2015)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악스러운 우리


"당근이세요?"

중고 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상품에 흠집은 있는지, 개봉 제품인지, 사용흔은 있는지 등의 자체적인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등급을 매긴다.

약점이라도 잡으면 협상의 달인이라도 된 양 흥정을 붙인다. 흥정은 거래의 균형추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행위이며, 우리에게 흥정은 생각보다 익숙한 일이다. 

'몸'과 '값'이라는 명사가 붙는 '몸 값'은 다분히 모순적인 단어다.

또한 우리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판단한다.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에서 소리 없이 치러지는 머릿속 계산들, 경조사()마저도 단순히 회수 가능성에 의거한 물자 교환으로 전락시킨다.

우리는 물질적 사고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그런 '이악스러움'은 우리에게 보편적이다.


성()이라고 신성할까


영화 전반부 주영(이주영)의 몸(성)에 대한 가격 흥정에서 우리는 약간의 역겨움과 마음 한 켠에 씁쓸한 이물감을 느끼지만, 어쩐지 이 상황이 낯설지는 않다. 물건의 가치를 숨기고 속이는 판매자와, 어떻게든 물건의 흠을 잡아 가치를 깎으려는 구매자를 우리는 익히 접하고 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영화에선 단지 '몸'을 사고판다는 것뿐이다.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성매매 전단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이미 신성한 영역으로 구분되는 성()마저 자본주의의 가치적 분류 대상이 됨을 수도 없이 목도했다. 그래서인지 '피'로 대변되는 성의 가치가 흥정의 대상이 될 때 느끼는 감정은 낯섦보단 익숙함이다. 주영의 몸(성)에 대해 가치를 매기는 장면이 단순히 "홍상수적 유희 느껴진다"는 혹자의 평은 우리가 얼마나 성의 가치화라는 문제에 대해 타성에 젖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성에 젖은 우리에게 던지는 일갈


<몸 값>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타성을 두 가지 방법으로 혁파하고자 한다.


첫째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도치시킨다.

가격 흥정을 위한 남자(박형수)의 인격적 모독에 가까운 가치 절하에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던 주영이 가해자의 위치로 올라설 때, 이분법적인 권력구조는 타파된다. 구조가 무너짐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흐려지고 사안은 보편화된다. 보편화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 거래의 판매자 또는 구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관찰자에서 대상으로 위치가 전환된다.

둘째, 거래의 대상이 성이나 노동력이 아닌 '신체' 그 자체가 되면서 '존재' 자체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제공한다.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성과 노동력 등의 거래는 존재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몸의 거래행위가 '일시적 사용'이라는 '노동적인 소비'에서 '영구적 양도'라는 '자본적인 소모'로 그 의미가 이양되었을 때 우리가 가지는 '낯섦'은 새로운 인식을 불러온다.

'관계의 도치를 통해 우리 모두가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그 위해가 일회성 소모가 아닌 영원한 소멸임을 문뜩 깨달았을 때가 돼서야, 우리는 너무나 익숙했던 지점들에 대해 숙고해보게 된다'


짧아서 좋은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이 할 말을 전해 관념을 부순다. 이주영의 양면적인 얼굴과 박형수의 특유의 톤은, 한식의 마늘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한 <몸값>의 양념이다. 발칙하고 생기 넘친다. 단편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영화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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