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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필 Jan 16. 2024

<애스터로이드 시티> 삶의 의미 따위는 알 수 없대도

#15 웨스 앤더슨,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 이 글을 포함한 모든 글은 알게 모르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TV쇼 방영을 통해 연극 창작 과정 전체를 무대 뒤에서 지켜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장소도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인물들과 터무니없게 발생되는 사건들도 모두 허구라고 한다. 가상의 소행성 마을에는 가상의 인물들이 모여들고, 가상의 사건들은 의미를 알 수 없게 일어나고, 점점 이야기는 방향을 잃는다. 어디까지가 연극 안이고 어디까지가 연극 밖인지,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점차 모호해진다.



햇볕이 따뜻하지도 차갑지 않으며 투명하고 무자비한 사막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세계는 잘 짜인 웨스 앤더슨의 공간처럼 언뜻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비드 한 색감에 강박적일 만큼 통제된 구조 속 진행되던 연극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개인적인 대화가 나오기도 하고, TV쇼의 진행자가 레이어를 넘어 실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급기야 오기(제이슨 슈워츠먼)는 연극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연극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연극의 의미에 대해 연출가 슈버트에게 묻는다. 한술 더 떠 연출자 슈버트(애드리언 브로디)는 "자네가 오기가 된 게 아니고, 오기가 자네가 된 거 같"다고 말한다. 


와이드 스크린 속 치밀하게 구성된 공간인 연극과, 좁은 화면 비와 흑백 화면으로 답답한 느낌마저 주는 백스테이지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혼동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연극인가 실제인가. 점차 모든 게 모호해지는 영화는 레이어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에게 공을 넘긴다.



알 수 없는 존재의 괴로움

홍상수 <옥희의 영화> 中 

"이 우유팩이 여기 놓여져 있는 이유를 알면 모든 걸 알 수 있다." - 홍상수 <옥희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 천지다. 오기의 자동차는 알 수 없는 부품 때문에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멈춰 섰고,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다가 다시 돌려놓는지 알 수 없다. 중간중간 들리는 총소리도 어떤 이유에서 발생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배우 존스(제이슨 슈워츠먼)조차 "오기가 왜 버너에 손을 갖다 댄 거지? 지금도 이 연극이 이해 안 돼요"라며 의아해한다. 계속해서 이유를 묻고 다니는 존스처럼 우리는 종종 이유가 없음을 참지 못하고 실제 삶의 여러 순간에(영화로 치면 여러 장면에) 어떤 이유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알기를 갈구한다.



 "모든 게 불확실해요,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왜 소행성을 훔친 건지 그게 우리 건 맞는지 우린 아는 게 없다고요,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 여기에선 모든 게 불확실하고 우린 아는 게 없다지만,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우드로'(제이크 라이언)의 대사는 인간이 숙명적으로 가지는 "부조리"함을 나타낸다. 인간은 어떠한 사건(특히 불행한 사건)을 보면서 이유를 끊임없이 찾는다. 이런 불행이 왜 나에게 닥쳤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지만 거대한 세계는 철저히 무신경의 태도로 인간을 관조한다. 철학의 탐구, 종교에의 귀의 등 인간은 계속해서 어떤 의미나 이유를 찾고자 매진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카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계 내에 던져진 실존의 '부재하는 존재 이유'와 그 부재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합리적 분투'가 공존하게 되고, 이때 발생하는 숙명적인 간극의 상태가 ‘부조리’다.



삶에서의 부조리함, 영화에서의 부조리함


운칠기삼이라느니,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느니 하며 삶이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일에 대한 합리적인 원인을 파헤치기 일쑤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특성은 영화를 볼 때도 나타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면 영화에서, 심지어는 장면 장면 마다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러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치"라는 트뤼포의 말이 교과서처럼 퍼져 있기에, 우리는 모든 영화가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GV를 가거나 관람평을 보거나 하면 꼭 장면마다의 의미를 묻는 질문과 해석이 빼놓지 않고 나온다.



웨스앤더슨의 영화는 특히 이런 의미 찾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쁘고 아름답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평은 그의 영화와는 불가분이다.. 웨스 영화가 실험영화와 같이 모든 의미와 메시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거나 도저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지는 않으나,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혹평은 자주 그를 따라다닌다. 그래서인지 나는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이에 대한 일종의 항변처럼 느껴진다. 


영화에는 정답처럼 정해져 있는 정독이 없으니, 그에 반대되는 오독도 없다는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각자의 해석과 취향에 따라 수 만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만 보더라도 부조리성과 극복, 이별한 자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치유, 로스웰 사건과 관련한 미국 사회에의 풍자 등 다양한 경로로 읽힐 수 있는데, 어쩌면 해석이나 의미에의 추종이 다방면의 영화 감상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한다그렇기에 단일한 의미를 추종하거나 도식적, 기능적 해석에 의존하는 것은 웨스 앤더슨이 영화를 만들면서 바라던 바는 아닐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TV쇼와, 연극의 안과 밖의 방향성을 무너뜨린다. 오기를 연기한 배우 존스는 "그의 아픔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캐릭터에 의해 배우가 변화한다.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일방적이던 방향이 상호적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가 없어"라는 대사를 곱씹어보면, 깨어나기 위해서는 잠들어야 하고 잠들기 위해서는 깨어나야 한다는 인과 관계의 무한한 순환같이 느껴진다. 이는 역시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단일한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무너진 영화의 구조와 인과관계의 틈으로 의미 추종의 역할은 무뎌지고 흐릿해지며, 외려 진짜 집중해야 할 것이 선명해진다.




삶의 의미 따위는 알 수 없대도, 그래도


"외롭게 살면서 배운 게 있네.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 말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볼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신뢰할 것."


돈은 많지만 은퇴 후 외롭게 살고 있으며, 딸을 잃은 상실감을 가진 스탠리(톰행크스)의 대사는 사뭇 마음에 와닿는다. 세상에겐 의미가 없대도 개인에겐 의미는 있다. 부조리하여 어떤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세상이라도 개개인이 자유롭게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의미, 수호하는 가치는 있다. 연극이 이해 안 되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상관없이 계속해야 하는 '연기'처럼, 삶이 이해 안 돼도 개개인이 가지는 숭고한 가치들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게 무엇이든. 세상의 의미로 생각되는 것들과 관련 없을지라도 지켜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지금 잘하고 있어"

"그냥 이대로 해요?"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래"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기만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가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지금 잘하고 있어. 그냥 이대로 해. 삶의 의미 따위는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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