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다 알아서 잘 풀리겠지
삼십 대 초반, 또 한 번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 생일에 뭔가 새로운 다짐을 한다거나 목표를 세울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꼭 이것저것을 이뤄낸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러루한 장기적 목표는 간간이 생각을 하곤 한다. 현재 제일 빤히 보이는 목표는 이 몇 년 사이에 한국 쪽으로 커리어를 옮길 준비를 시작하고, 웬만하면 그 과정을 완전히 끝낸다는 것이다. 비록 아직은 전혀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지만.
삼십 대 초반인 나와 사십 대인 남편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다행히 둘 다 팀리더인지라 회사 내부 일에 대한 고민이나 스트레스는 고만고만하여 대화에 높낮이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얘기를 할 때면 상황이 아예 달라진다.
기왕이면 현재 직장에서 퇴직까지 가고 싶어 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직장생활 10년 한결같이 쩍 하면 퇴사 생각이다. 심지어 퇴사를 하고 뭘 할지 꼼꼼히 계획하기도 하며 (머릿속으로만 말이다), 직장 상사와 퇴사하려는 마음을 디테일하게 공개하는 배짱까지 있다. 이게 직장생활에서 상당히 금기시된다고 알고는 있지만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 세 곳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늘 이랬다.
이번 회사에서도 여러 번 시도를 했던 것 같다.
제일 최근으로는 몇 주 전에 상사와 진지하게 퇴직의향을 밝혔었다.
현재 회사 상황, 팀 상황이 여차여차한데 결론은 차일피일 미뤄지고만 있고, 지금 방향으로 보면 이렇고 저런 불리한 상황으로 갈 게 뻔하기에 나는 내 커리어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이 걸 피하고자 9월 30일에 퇴사를 할 생각이라고.
물론 이렇게 얘기를 꺼내기 전 3개월 전부터 거의 매일 남편과 토론을 했었다.
내가 정말 새로운 회사 offer 없이 무작정 퇴사를 해버리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지.
그 기나긴 토론 뒤 함께 내린 결론은, 퇴사를 진짜 하게 된다면 1년 정도 내가 무직인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 생활 퀄리티는 지금대로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실은 집 월세를 계속 내가 부담하기로 했기에 남편의 지출은 내가 사직을 하든 안 하든 별 차이가 없다).
백수가 되면 급하게 새로운 일을 찾는 대신 일단 나에게 집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Coursera 온라인 수업들도 많이 듣고, CATTI 번역자격증도 시도해 보고, 운동도 많이 하면서 제일 위에 언급했던, 어떤 방향으로 커리어를 틀어야 몇 년 뒤 한국 정착에 도움이 될지 고민하려고 했다.
이렇게 마음준비를 다 하고, 사직이메일까지 다 작성한 뒤에서야 상사와 퇴직의향 얘기를 했는데, 상사가 자기에게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회사 내 다른 기회들을 알아봐 주겠다고.
지금 갑자기 생각을 바꾸기에는 낯이 간지럽긴 했다. 하루아침에 내린 결정도 아니고 분명히 퇴사해야 하는 이유 대여섯 개 정도는 입에서 술술 나갈 정도로 생각을 곱씹었던 과정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사와 대화를 하는 과정에 내 결심을 제일 크게 흔들어 놓은, 한 달만 기다려 달라는 이 제안을 거절할 제일 큰 이유가 사라졌다.
승진 실패와 쥐꼬리만 한 급여인상보다도 내가 싫었던 건 바로 회사 부문 조정의 밑도 끝도 없는 지연이었다. 옛 계획대로라면 8월부터 상당히 많은 미팅을 했어야 하는데 리더십은 감감무소식이고, 나는 3개월 내내 거의 스무 명 되는 팀원들을 달래야 했다.
그 과정이 길어지다 보니, 어쩌면 내가 수동적으로 나나 우리 팀에게 안 좋은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고, 그 배정된 결과가 나의 커리어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커져 그전에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이게 바로 제일 큰 이유로 되었다.
상사는 나의 이 생각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 리포팅 라인이 나의 동의 없이 하루아침에 쥐도 새도 모르게 변해버릴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다. 내 상사는 회사에서 크게 인정을 받는 능력 있고 믿음직한 리더이기에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덤으로 최소한 한 달 급여도 더 받을 수 있게 됐고, 회계연도 연말 보너스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생일 전 퇴사 관련 글을 브런치에 "자랑스레" 올리려고 했던 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예정된 부산 3박 4일 생일여행은 한가한 백수가 아닌 연차 쓰는 회사원 마인드로 다녀와야 하는군.
11월이 되면 내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과연 계획했던 대로 백수가 되어 새로운 생활패턴에 적응해야 할지, 아니면 상사가 곧 제안할 기회를 잡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직장생활을 계속하게 될지.
알아서 잘 풀리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