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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룽이 May 31. 2024

섣불리 퇴사를 하지 못하는 자의 단상

요즘 회사가 위태롭다


요즘 회사가 위태롭다.


연초까지만 해도 올해 중순 회사 이사장이 임용되면서 자연스레 바뀌어질 이사회/경영진 때문에 그에 따른 자질구레한 일이 많아질 줄만 알았지, 회사 루머 아닌 루머 때문에 회사 주요 업무가 심각하게 삐걱거리게 될 줄은 몰랐다. 루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크게 번져갈 줄은 더 몰랐고.


가뜩이나 침체된 경제 때문에 이미 3년 전보다 여러 모로 많이 열악해진 회사 상황이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니. 회사 돈으로 MBA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상당히 많은 복지를 향수했 던 내 옛 보스는 2년 전, 제일 좋은 타이밍에 맞춰 완벽하게 이곳을 떠났다. 인수인계를 받고 열심히 팀을 키워가면서, 올해에는 분명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어울리는 부장? 부부장? 타이틀로 승진을 할 거라 확신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 회사 상황은 참 당황스럽다.


모처럼 연차 내고 일 생각을 절대 하지 않기로 결정한 오늘은 금요일, 3개월 만에 필라테스를 하고 나름 상쾌하게 핸드폰을 체크했더니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비즈니스 측 매니저가 사직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승진 유망주라고 알려진 분이라 내년부터는 거의 우리 팀 비즈니스 측 주요 보스 중 한 명이 될 거라 추측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니. 겨우 10분 정도의 짧은 통화였지만 덕분에 회사 중요 부서 현황을 더 직접적으로 전해 듣게 되었다.




우리 회사 최악의 고비 중 하나라고 추측되는 이런 상황도 상황이지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typical 한 외국계 기업 출신 프로덕트 매니저 / 프로젝트 매니저 일을 주요 업무로, 상황 따라 팀 관리와 부하직원 관리를 도와주면 되던 내가 갑자기 팀리더가 되면서 생긴 업무 변화는 상당히 컸다.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면 둘도 없는 절호의 로켓승진 / 연봉인상 기회겠지만 참 안 좋은 타이밍 때문에 reward 쪽으로는 아직까지 딱히 얻은 게 없는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려는 마음으로 나름 최선을 다 하며 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차피 팀 전체로 받는 피드백은 눈에 뜨이게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눈앞의 돈과 이익을 안 따지고 길게 보면 이 또한 좋은 경험이니까.


업무시간 90% 이상을 낙관적인 마음가짐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요즘 무기력해지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팀 budget 결정 과정에 피할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토론들, 연말평가 초반 피드백 과정에 받게 되는 수십 개 request, 이걸 떠나 독특한 리포팅 라인 때문에 extra로 해야 하는 팀 IT 제품 포트폴리오 분석들 milestones, value, cost, forecast… (신성한 우리말 글쓰기 플랫폼에서 들쑥날쑥 영어에 엉망진창이군…) 그냥 이러루한 일에 팀 관리 정도라면 뭐 견딜 만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우리 회사가 처해 있는 상황은 m 부족에 n 변화. 더 쉽게 말하려면 당장 내가 한 달 뒤에 누구한테 리포팅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팀의 운영 scope는 어떻게 변할지, 심지어 우리 팀이 완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하루종일 이메일 미팅 PPT 무한반복, 그리고 연말평가 기간이라 시도 때도 없이 피드백을 신청하고, 답장하고. 내가 지금 문자놀이를 하는지 영어공부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우리 팀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자괴감.


요즘 중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유명한 중국 드라마 Qing Yu Nian (경여년) 최신 시즌2를 본방사수 중인데 드라마 속 사람들의 명정암투를 보면 와 정말 우리 회사랑 비슷하다 이렇게 느껴지면서 웃프다.




그렇다고 몇 년 전 나처럼 무작정 퇴사를 할 수도 없다, 다른 회사 offer조차 없이.


일단 한국 정착은 2030년쯤으로 생각을 하고 있기에 당장 한국 직장을 알아볼 수는 없다. 물론 현재 경력으로는 당장 매칭이 잘 될 만한 한국 회사가 거의 없겠지, 비즈니스 한국어를 손에서 놓은 지도 10년은 지났고.


LinkedIn을 포함한 직장 app에 업로드된 상해 기회들을 훑어봐도 관심이 가는 기회가 보이질 않는다. 특히 중국 app에서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기로 유명한 일부 회사들을 걸러내면 듣도 보도 못한 중국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외국계 회사와 중국계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은 상당히 다르고 업무처리 방식도 거의 극과 극이다. 일단 성격 기업문화 이런 걸 생각하기 전에, 10년간 업무를 영어로 해 온 내가 당장 중국계 회사에 가서 중국어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중요한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응 이건 절대 아니야.


혹시 퇴사를 당하진 않을까?


퇴사를 당하면 배상금 n+1이 기본으로 나온다고 한다 (현 직장 근무 연한+1의 월봉). 당장 손에 offer이 없다면 퇴사를 당하는 게 직접 퇴사를 하기만 훨씬 이득이군.


하지만 우리 팀이 뿌리채로 뽑히지 않는 이상, 회사에서 굳이 배상금을 내면서 가성비가 상당히 높은 나를 짜를 이유는 없겠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이 회사에 온 지는 겨우 3년 반이지만 최근 2년 정말 많이 정이 들어버린 우리 팀. 평균 나이가 30대 초반이고 대부분 똑똑하면서도 선한 사람들이기에 서로 좋은 영향을 주며 좋은 reputation과 건강한 팀문화를 만들었다는 것! 사랑스러운 팀과 어려운 문제들을 토론하고, 해결해 가고… 그러다 보면 당장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보인다.


요즘 회사 상황이 다 정리가 되고 후폭풍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 하여 팀을 지키면서, 팀의 미래와 나의 승진을 함께 계획하며 추진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게임하듯 조금만 더 견뎌 보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

어차피 지금 당장 더 끌리는, 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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