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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 Dec 11. 2022

데미안

영화 트루먼쇼와 지평의 끝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


주인공 싱클레어가 처음엔 멀리하다 이후엔 좇았던, 결국엔 다다르게 되었던 이상적 존재인 데미안은 이 편지를 통해 마치 선각자가 자신의 지혜를 조심스레 내밀듯, 싱클레어에게 세상에 대한 시각을 전한다.


알을 깨지 못한 새는 그 안에서 죽어간다, 어둡고 딱딱한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 믿으며. 그렇기에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펼치려면 알을 깨야 한다. 어떠한 위협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알을 깨고 보니 눈앞에 뱀이 있더라도, 깨고 보니 혹독한 추위가 있더라도, 새는 태어나려면 알을 깨야 한다. 하지만 처음 살아보는 삶에서 지금 내가 알 속인 지, 지금이 알을 깨어야 할 순간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Photo: Moviestore/REX/Shutterstock/Moviestore/REX/Shutterstock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 버뱅크는 하루 일거수일투족을 숨겨진 카메라들을 통해, 외부의 '진짜 세계'로 생중계당하고 있다. 지금으로 보면 인터넷 생방송과 비슷하겠다. 트루먼의 삶은 태어나는 출산의 순간부터 초, 중, 고, 대학교, 결혼, 취업까지 모든 과정이 생중계되어왔다. 평범하고 무탈한 삶, 착한 이웃들과 착한 직장 동료들 틈에서 "축복받은" 삶을 반복하던 그는 어느 날, 날개 없는 이상 물체의 낙하를 목격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커다란 조명등, 그리고 거기엔 "시리우스(9 큰 개자리)"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려지길 밤하늘의 별을 흉내내기 위한 천장 조명이었다.


Photo: © PARAMOUNT PICTURES

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세계에 의문을 품게 된 트루먼은 끝내 이 세계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한다. 작은 보트를 타고 폭풍우를 지나 그렇게 바다의 끝, 무대의 끝, 세계의 끝을 마주한, 평생을 안전한 곳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트루먼은, 밖은 훨씬 위험할 것이라는 제작자의 겁박에 "못 볼지 모르니까 미리 하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라고 말하고 그 세계를 탈출한다. 바다를 두려워함에도 바다를 건너 지평의 끝, 세계의 끝에 도달하였고, 미지의 두려움에도 그는 알을 깨고 나왔다. 그렇게 그는 진짜 그 자신, True man이 되었다.


굳이 내가 트루먼이 아닐지라도, 나의 삶엔 ‘나’라는 한계가 있음은 명백하다. 나의 지평(地平)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세계가 알 속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하다. 트루먼이 지평의 끝에 도달하여 비상구를 발견했듯, 알의 끝에 도달하여 알 껍데기를 만지기 전까지는 알 속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사소하든, 얼마나 자질구레하든 나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마주할 것이다. 그것이 책을 읽어서든, 낯선 환경이든, 데미안 같은 사람과의 인연이든. 그런 경험으로 지평의 끝을 마주하고 그렇게 또 하나의 알을 깨뜨릴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항상 알 속이다. 무언가 낯설고 다른 것을 마주하게 되면 알 껍데기를 마주한 것은 아닌가 하며 반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알 껍데기를 깨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를 오만이 방해할지도 모르니.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고정관념, 편견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산물이었다고 한다. 뇌 속에서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빠른 판단을 하여 생존을 도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는 순간적인 판단을 못해 살아남기 힘들었을 테니까. 현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어린이는 도로로 불쑥 튀어나올 수 있으니 운전에 조심하고, 노인은 다리가 아플 수 있으니 교통약자석에 앉을 수 있다는, 편견과 상식의 사이에 걸쳐 있는 것들이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편견이라는 단어는 나쁜 의미로 쓰이고 있다.


'부끄러워야 할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위 사상에 덧씌워져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무엇이 아무것도 아닌지, 무엇이 편견이고 무엇이 아닌지, 그것은 알을 깨뜨리려는 버둥거림으로 또 하나의 갇혀 있던 세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수업 중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듣는다.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로, 카인은 농부, 아벨은 가축을 기르는 목자였다. 그러나 카인이 아벨에게 질투를 느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서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아벨은 최초의 사망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에 싱클레어는 카인을 악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말한다. '카인은 사실 악인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떠한 살인이었을지는 모르나 그 행동이 영웅적인 행위였을지도,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카인의 강함이 두려웠기에 주위 사람들이 악의적인 별명을 붙여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말들은 언제나 전하는 사람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

싱클레어는 선악의 구분이 명백하다고 보던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파문을 일으킨 데미안을 두고 혼란스러워한다. 카인은 악이고, 아벨은 선인 것이 당연한 것인데, 선일지 악일지 모른다니. 그러나 그것이 데미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아브라삭스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이다. 데미안은 말한다. 자신이 선하다고만 믿는 사람은 반쪽짜리 인간이다.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신조차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선으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고 믿는 것은 불완전한 세계를 향한 불완전한 믿음일 것이다.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알을 깨고 날아가는 새가 당도하는 곳이 아브라삭스이듯이, 자기 자신에게도 선과 악의 공존이 있음을, 타인에게도 선과 악의 공존이 있음을 깨달아야 알을 깨고 아브라삭스의 곁으로 비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미안의 말처럼 맹목적인 선과 악의 구분이 불가능 하다면, 세계가 아브라삭스처럼 선과 악의 공존이라면, 결국 믿을 것은 개개인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판단, 가치관들이다. 데미안이 보는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가치관이라는 것이 사회에서 굳어진 전통적이고 일관적인 관념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버둥거리고 비판하고 의구심을 품어서 얻어낸 개인적인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전통적인 관념의 탓을 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선택과 책임은 각자의 본질을 이루게 하고 실존 위에 자유롭게 한다.


저자 헤르만 헤세는 책 ‘데미안’의 도입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인 동시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좁은 길 자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일찍이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서투르게, 어떤 사람은 좀 더 현명하게 노력하며,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누구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출생의 흔적, 원초적인 과거의 점액과 알의 껍데기를 지니고 산다. 어떤 것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의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어떤 것은 허리 위는 인간이고, 허리 아래는 물고기에 그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인간이 되라는 마음을 담은 자연이 던진 주사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동일한 기원, 즉 같은 어머니를 갖고 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심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심연에서 나온 실험 대상이자, 던져진 주사위인 각 개개인은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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