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는 초록애벌레 한 마리가 보도블록 위를 부지런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발짝만 무심히 내디뎠더라면 끔찍한 사고가 날 뻔했지요. 우리 강아지 니모랑 산책을 나가면 종종 재미난 광경을 목격하는데 오늘은 초록애벌레를 만났습니다. 애벌레도 나의 유심한 눈빛을 감지했는지 순간 움찔하다가 무작정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기념사진도 한방 찍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부러진 가지를 주어 애벌레를 조심히 들어서 화단 안쪽으로 들여놔 주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고 꼬물거리는 곤충들을 좋아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벌레만 보면 벌벌 떨던 때도 있었지요. 초등학교 5학년이던 초여름 이맘때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는 왜 그렇게 송충이가 많았던지 여기저기떨어져 있는 송충이를 보고놀란 여자아이들의 꺅꺅 질러대는 비명소리와 송충이를 잡아 여자아이들을 놀리던 남자아이들의 깔깔 대는 짓궂은 웃음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들리곤 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우리 반에는 얼굴에 덕지덕지 장난기가 붙어있는 ‘톰 소여’ 같은 개구쟁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톰 소여가 장난을 치며 돌아다닐 때마다 슈퍼맨처럼 짠 나타나서 상황을 정리하는 모범생 반장도 있었습니다. 나는 점심시간에 점심을 빨리 먹고 친구들과 정글짐에서 얼음땡을 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톰소여가 어슬렁 다가와서는 “홍선영 너한테 줄 게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톰소여가 많이수상했지만 그날따라 진지한 표정에 속아 “뭔데?”하며 정글짐에서 내려왔습니다. 톰소여는 조금 수줍어하며 “손 내밀어봐”했고 나는 그때 꽤나 멍청해서 손을 내밀고 말았습니다. 그다음은 모두의 상상처럼 꿈틀거리는 송충이가 내 손바닥에서 뒹굴었고 나는 운동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순간 슈퍼맨이 나타났습니다. “야! 톰소여 넌 오늘 여자애들 괴롭힌 죄로 청소야.”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송충이를 꾹꾹 발로 밟았습니다. ‘아... 진짜!’ 송충이도 징그러웠지만 슈퍼맨의 발에 밟혀 터져 버린 송충이는 더 끔찍했습니다. 나는 두 녀석들 때문에 결국 울고 말았습니다.
톰소여의 자리는 내 자리에서 가까운 옆 분단에 있었고 내가 째려볼 때마다 딴청을 피웠지요, 슈퍼맨은 내 짝이어서 5교시 내내 내 눈치를 보며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왔는데 뭔가 술렁술렁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앞에 앉아있던 친구가 귓속말로 얘기해 주었는데 오늘 아침에 누가 칠판에다가 ‘슈퍼맨이 홍** 좋아한다’고 크게 써놔서 방금 슈퍼맨이 칠판을 지웠다고 말입니다.
다음날에도 칠판 낙서는 계속되었고 나는 범인이 누군지 꼭 잡으려고 친구들과 아침 일찍 등교를 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며칠 지나서 이번에는 청소시간에 슈퍼맨이랑 홍**이 뽀뽀했다고 칠판에 낙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낙서를 본 순간으으... 머리에 지진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소문은 자꾸 돌아서 결국 슈퍼맨과 나는 공식 커플로 불리게 되었지요. 나는너무 창피해서 당장전학이라도 가고 싶었고 칠판 낙서 사건을 선생님께 일렀습니다. 선생님은 전학 대신 짝을 여자 친구로 바꿔 주셨고 그때부터 우리 반은 남남, 여여 짝으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후로는 칠판 낙서도 사라지고 소문도 잠잠해졌습니다.
범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나는 처음에 톰소여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톰소여는 뽀뽀 낙서가 쓰여 있던 날 아파서 결석했습니다. 그렇게 칠판 낙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아직도 범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나는 꼬물거리는 애벌레를 보아도 징그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벌레가 어디로 가는지 애벌레는 자라서 어떤 곤충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검색을 해보니 초록애벌레는 아마도 배추흰나비가 되길 꿈꾸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만난 초록애벌레가 무사히 잘 자라 하얀 나비로 팔랑팔랑 내게 다시 와주길 바래봅니다.
나는 오늘도 니모와 산책을 나왔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다니며 이야기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주울지 아직 모릅니다.혹시 우리 니모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메거진'소심한 소소씨가 하려던 말'에서 '니모를 찾았다'를 읽어보세요. 얼마 전 니모 덕분에 조회수가 9000을 넘긴 이야기로 저도 깜짝 놀랐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