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대신 모과를 따줘!

가을 타다

모과가 쿵! 떨어져서 데구르르 굴러왔다.

가을이 내 앞에 당도한 것이다. 우리 동네 산책로에는 앵두, 살구, 버찌, 매실, 감, 대추 그리고 모과까지 과일나무들이 많이 있다. 그중 크고 울퉁불퉁하지만 가장 감탄할 만큼 달큼한 향기를 발산하는 것은 모과이다.

여름 내내 찬 커피만 벌컥벌컥 마시다 갑자기 공기가 쌀쌀해지니 따뜻한 모과차가 당긴다. 냉장고에서 남편이 담가놓은 모과 청을 꺼내어 찻잔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으니 달고 신 모과향이 그윽하다.

남편은 나에게 한 번도 허풍스러운 사랑의 맹세나 간지러운 연애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남편이 무뚝뚝하거나 무심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밥 먹을 때 언제나 먼저 생선살을 발라 내 밥그릇에 놓아주고 고기도 셰프처럼 맛있게 구워 내 입에 쏙 넣어주고 딱히 할 말이 없어도 전화도 자주 하고 나와 손을 잡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며 나를 웃게 하는 다정한 사람이다.

지난해 가을 남편과 동네 산책로를 산책하다 황금빛 모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과나무를 찾았다. 여름끝자락에 아직은 설익은 모과를 보며 노랗게 무르익는 계절이 오면 따기로 점찍어 놨던 그 나무이다. 제일 높은 가지에 탐스럽게 열린 모과를 보고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별 대신 저 황금빛 모과를 따줘!”

“그러지 뭐! 그게 모과 어렵다고!”

키 큰 남편은 내가 여기저기 지목한 모과를 용케도 똑똑 따서 나에게 안겨주었다. 방금 따서 신선한 모과 향이 머리까지 상쾌하게 했다.  

모과는 과육이 딱딱하고 시고 떫어서 생으로 그냥 먹을 수는 없어 모과 청을 담기로 했다. 단단한 모과를 내가 잘 썰지 못하고 다칠까 봐 염려한 남편은 손수 모과를 소금물로 박박 씻어서 또각또각 잘게 썰어주었다. 그러면 나는 유리병에 담고 설탕을 부었다. 그렇게 완성된 모과 청을 겨울 내내 먹고 남아 있는 것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마시곤 했다. 또 목감기가 자주 오는 식구들에게 모과차는 상비약처럼 유용하게 쓰였다.

남편도 나도 갱년기라 둘 다 신경이 예민할 때가 많다. 솔직히 남편의 잔소리는 나보다 훨씬 심하다. 그래도 남편이 만들어준 정성스러운 모과차를 봐서라도 내가 참아야지 한다. 동시에 화내는 것을 자제한다. 거의 바닥난 모과 청을 보며 다시 모과를 따러 산책을 가자고 남편에게 말해야겠다. 이번에는 나도 남편의 모과 청에 보답하는 뜨끈뜨끈한 곰탕을 한 솥 끓여놔야겠다.

라디오를 듣는데 아나운서가 오프닝 멘트를 하며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라고 했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가을이 좋다. 외투를 입었을 때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도와 선선한 바람과 쓸쓸한 낙엽 냄새가 가을을 타게 한다. 그래서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손을 잡고 흔들흔들 걷기 좋은 코스모스 꽃길도 은빛물결 넘실대는 억새 풀밭도 가을 타는 사람들을 부른다.     

사람과 사랑은 글자 모양이 참 많이 닮았고 발음도 비슷하다. 굳이 두 단어의 어원을 따지지 않아도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 느낄 수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받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다가 눈을 감는다. 그러니 올가을에도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가을이 어떻게 당신에게 오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가을은 모과 향기를 안고 쿵! 데구르르 굴러온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가을은 달달한 모과 향기 폴폴나는 사랑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