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자른 것에서 시작한
이른 저녁을 먹고 침대에서 책을 읽다 책의 저자가 미용실을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도 얼마 전 미용실에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
몇 년을 기른 머리가 많이 상해 다 자르긴 아깝고 적당히만 다듬자는 마음에 동네 미용실 중 가장 저렴한 곳을 찾았다. 많이 저렴한 편이라 별로일 것에 대한 실망도 미리 내려두고 간 터였다.
대강 길이를 손으로 표시하고 마지막으로 층을 좀 내달라 말씀드렸는데 그 말이 크게 작용을 한 건지 진짜로 층이 제대로 났다. 일순 내 머리카락에 계단이 생겨버린 거다.
집에 돌아온 뒤 거울을 보며 처음엔 믿을 수 없어하다 나중엔 오늘 저녁 누군가 이 계단을 열심히 올라와 내 머리 꼭대기에 정상 깃발을 꽂을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주접스러운 망상들을 겨우 떨친 뒤 수습을 위해 또 다른 동네미용실을 찾아갔다.
난감한 머리와 그걸 바라볼 매일을 감당할 수 없어 찾아간 다른 미용실에서 이번엔 아쉬운 부분들을 정리하다 보니 나중엔 머리를 잘랐다가 아니라 머리가 없잖아? 싶을 만큼 짧은 머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결과물인 머리의 모양새가 괜찮아 적당히 수긍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나는 한 번 돈 내고 적당히 만족할 일을 괜스레 두 번으로 나누어 일을 번잡스레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일로 얻은 교훈은 '아낀 만큼 모자랐다.'였다.
이 교훈은 여기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건 사실 방금도 한 차례 일어났다.
오늘부터 식사량을 줄이자며 한눈에 보아도 적은 양의 식사를 한 뒤 푹신한 침대에 앉아 따스한 조명을 받으며 독서를 시작했는데, 그 상황에서의 만족감이 큰 나머지 마음이 느슨해져 귤 두 개와 과자 한 봉지를 몰래 도둑 든 마냥 해치워버렸다. 즐거운 독서시간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조화롭고 균형감 있는 간식이었다기엔 양이 너무 많았지만 독서에 집중한 와중 불시에 일어난 일이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적당히 모르는 일로 해두기로 했다.
이것 역시도 '비운만큼 채워진다'와 같은 빈틈없는 자연의 섭리, 이치를 보여주는 따끈한 사례였다.
세 번째로 할 이야기는 약 2달 전부터 좋아하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약간의 특이점이 왔다.
예전엔 누가 뭘 준비하냐 물었을 때면 언제고 아무렇지 않게 뭘 하는 지를 말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된다.
왜 그럴까를 한동안 고민한 끝에 답을 찾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너무 좋아해서'가 이유였다.
사람이 왜, 이상형을 만나면 자기가 그에 한참 모자라는 상대일 것 같아 좋으면서도 숨고 싶고 그 마음이 들킬까 조바심이 나는 상황이 있지 않나
나의 경우에도 지금 하게 된 일이 평소 너무 하고 싶어 하던 일이었고 잘하고 싶어 늘 과도하게 신경을 쓰게 되는 데, 그렇게 나에게 의미가 크게 다가오다 보니 아직 내가 이 일을 흡족할 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 단계가 괜히 속상하고 선뜻 뭔가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창피해진다.
누가 봐도 "저 사람 ㅇㅇ하는 사람이네."라는 소리를 들을 때가 되어야 내 입으로도 자연스레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이 일과 나의 심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다.
너무 좋아해서 종종 서럽고 서러워서 더 서러워지는 끊임없는 반복.
그래도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하니까 시간에 기대어 볼 참이다.
네 번째로 할 이야기는 앞으로의 삶에서 내 좌우명을 "물 흐르듯이 순리대로 살자."라고 할까 하는데
이건 소극적으로 삶에서 맞닥뜨릴 온갖 어려움에 투항하겠다는 무력한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리지 않고 순순히 겪어내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다. 어느 것 하나 비껴 나는 것 없이 삶을 기꺼이 온몸으로 맞이하겠다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거다.
그간 '온실 속 잡초'로 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 드디어 끝없는 들판으로 나와 제자리를 찾아가는 내게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글을 주기적으로 쓰려했는데 정작 더 안 쓰게 된 건 이전보다 나은 글을 쓰려했더니 그때그때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과연 별 의미도 없이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 생각들을 자꾸 내 속에만 차곡차곡 쌓아두게 됐기 때문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내밀하고 방향 없는 마음들이지만 시간이 지나 충실히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한 데 모여 잘 숙성된 글이나 또 다른 어떤 형태로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이것 또한 순리대로, 시간에 맡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