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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잠 Oct 19. 2024

취향에 관하여

청바지를 좋아하세요?

사람들과 모이는 자리에 가면 간혹 서로의 취향에 관해 묻게 된다.

너는 어떤 음식을 좋아해? 와 같이 대화의 시작을 여는 질문부터 친밀함이 더해진다면 너는 어떤 바지 좋아해? 어떤 사람을 좋아해? 와 같은 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취향이 뭔지를 묻기도 한다.

음식이라면 대체로 치킨, 피자, 돈가스 그 외 몇 개의 예시를 벗어나지 않는 선택지 중 하나일 때가 많고 좋아하는 바지의 경우 청바지가 아닌 대답을 들은 적은 잘 없는 것 같다.


평소라면 대개 그렇지, 했을 법한 이야기들이지만 어쩌다 생각이 딴 데로 새는 날엔

우리는 정말로 그런 것들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걸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장 많이 접하고 익숙하다 보니 어느새 좋아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아닐까 싶은 거

그렇다면 그건 좋아해서라기보다 그저 익숙하고 쉽게 닿는 곳에 있어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아니라기엔 우리의 취향은 왜 몇 개의 예측가능한 음식, 사물 또는 사람으로 귀결되는 건지,

그건 치킨, 피자, 돈가스 등이 눈에 띄는 메뉴의 대다수이고 청바지조차도 바지들 중 역사가 제법 길고 형태나 디자인이 가장 다양하기에 다른 대안을 찾을 방법이 없어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최선의 취향이 정해지고 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취향이라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걸까, 싶은 거다.


사람에 관해서라면 다를까? 큰 차이는 없게 느껴진다.

자주 접하고 계속 맞닥뜨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이 내 취향이 되는 게 늘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주위에 있는 몇몇 선택지 중 가장 가깝고 낯익은 동시에 친숙한 어떤 것에 손을 뻗게 되는 것

이쯤 되면 취향은 단순히 친숙함이라고 명명해도 될까-

그러기엔 아주 가끔 예외가 생기고 그건 바로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다.


그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데이터로 찬찬히 축적되어 온 이상적인 상대에 관한 조건들, 다정하고 성실하고 유쾌하고 배려 깊고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한 어떤 판단을 할 겨를도 없이 보는 순간 사랑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 말이다.

예측가능하고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상황에 대한 계산을 접어둔 채 일단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는 본능이 이성을 앞지르는 순간, 우리는 이걸 운명이라고 여긴다.

익숙하고 편한 것이 당연한 삶의 관성이 타의에 의해 깨져버린 거다. 그 또한 그녀를 봄으로써-

자의가 개입할 시간조차 없었음에도 누군가에게 반하는 때의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마치 내가 그나 그녀를 선택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강렬한 느낌은 나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확신으로까지 번져나간다.

아직 잘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기 때문에 우린 완벽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측. 콩깍지가 이미 씌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직감만에 의존하고도 우린 주저 없이 사랑에 맹렬히 돌입한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맹신에 가까운 장밋빛 기대를 품은 사랑이므로 초반의 기세가 아주 좋다. 이대로 사랑의 가지를 뻗어나가기만 하면 다 괜찮을 것 같이 충분하게 느껴지니까, 같이 숨만 쉬어도 즐겁고 막연한 불안감도 없다.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사랑이라는 주도적인 감각까지 얻을 수 있으므로 일상이 놀라움의 연속이고 없던 자신감도 충만하게 된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시간이 지나기 전까진,,   


나도 모른 채 씌워진 콩깍지가 시간에 마모되어 깎여나간 뒤에 우리는 새로운 사랑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벌거벗은 모습의 서로를 제대로 보게 된 우리는 길을 가다 낯선 이와 부딪친 것처럼 깜짝 놀라고 만다. 넌 누군가? 하고. 이 충격은 아주 커서 항상 붙어있었음에도 정작 평소에 늘 있던 아무개들보다 더 생경한 감각으로 서로를 보게 된다. 내가 환상 속에서 만든 사랑이 자아낸 친숙함이 걷힌 뒤에 마주한 그는 누구보다 낯선 사람이 되고 마는 거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이제껏 만났던 주변인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모르는 타인과 가까워지는 단계를 거치듯 서로에 가까워질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부터가 제대로 사랑을 시작할 기회라는 걸 망각하고 몇 달, 몇 년에 걸쳐 이미 남루해진 상대만을 본다. 빛을 잃은 서로를,, 빛나지 않은 것을 구태여 사랑하기엔 우리는 너무 합리적이니까.

몇 년에 걸쳐 의도치 않게 곁에 있어 친숙하고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버린 누군가들보다 첫눈에 반한 상대가 불편해지면서 우리는 차츰 그 사랑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제 와서 갑자기 친숙함에 익숙했던 본능이 중요해지는 거다. 첫눈에 반한 것도 본능적이었을 것임에도. 거창하고 요란했던 사랑은 변변찮아졌고 어쩐지 숨기고 싶은 과거같이 느껴진다. 처음과 지금의 간극이 클수록 어딘가 도망쳐야겠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과감각 된 사랑의 실체가 정직하고 솔직해진 것뿐이지만 왠지 우린 서로의 민낯이 드러난 듯한 수치심이 든다.


다시금 사랑의 정의를 바로잡고 싶어지는 시점이 찾아왔다. 내가 원래 알던 사랑은 변함없고 무탈한 평온한 나날들 같은 거라고, 나는 잠시 환각상태에 있던 거라고,, 아마 계절이 너무 을씨년스러웠거나 마음이 헛헛하고 되는 일이 없고 미래가 막막해서 마음이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라고 묻지도 않은 변명을 댄다. 부끄러움이 커진 채 서둘러 관계를 매듭지은 뒤 우리는 원래 우리가 속했던 잔잔한 세상으로 잽싸게 돌아간다.

첫눈에 반했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반했기 때문에 정작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평범해진 상대를 빛낼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음에도 스스로 포기하고 놓아버렸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성숙한 사람들이 애초에 첫눈에 사랑에 빠질 확률이 있는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사랑의 단계가 시간이 어떤 식으로 흐르든 사랑-사랑-사랑일 가능성은 어떻게 성립하는 걸까. 단계별로 변화할 줄 아는 유연함이 없는 사람들은 끝끝내 시작에 머무르고 말 텐데 그런 이들이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해선 결국 다가오는 사랑이 친숙함일 때라야만이 원만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걸까.

돌고 돌아 이런 사람들에겐 첫눈에 반해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기까지 하는 사랑은 요원한 일일까, 반대로 첫눈에 반함 없이 꾸준히 나아가는 연애의 경우는 타협은 아닌가? 이 사랑은 무조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나? 역시 모르겠다. 첫눈에 반하고 나날이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 사랑은 티비나 영화에서도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일인가? 완벽한 사랑이란 실체없는 이상일 뿐인가? 우리의 취향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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