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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Dec 04. 2022

사랑하는 자가 될 것

   연애를 할 때 어려웠던 점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자면 연인 간에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고백이 내게는 좀 어려웠다. 모순적으로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손 편지를 자주 쓰고 그 때마다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어떤 활용형으로든-사랑하는,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하고 등등- 집어넣었으며, 우리 반 학생들은 덮어 놓고 ‘사랑하는 내 새끼들’로 여겨왔다. 그런 예쁜 말이 연애 관계로 오면 내뱉기가 참 쉽지 않았다.  


  “요즘 연애 어때?”라는 질문을 듣고 나는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정작 상대에게 하기 어려운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사랑에 빠지다’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깊이 빠진 내 마음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에게 하는 “사랑해.”라는 표현은 단순히 내 상태를 표현하는 걸 넘어서서 어떤 선언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너는 내 사람이라고, 나는 네게 어떤 걸 받지 못하더라도 바라지 않는 채로 기어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사랑한다는 고백은 진심을 말로써 보여주는 일종의 행위 같았다. 더 이상 나만 아는 마음이 아니기에,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시작이라는 느낌.   


   사랑이 단순히 어떤 감정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축소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인간의 모든 감정을 함축한 일종의 정신 작용이자 이에 따른 육체적 반응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게 나의 가설이다. 사랑은 우선 그 대상과 그 대상을 이루는 것들이 정말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 그러니까 포용의 결과이다. 사랑은 그 대상의 하나하나를 알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탐구의 과정이다. 사랑은 그 대상의 곁에 가 닿고 싶은 마음, 그렇기에 조금 더 걸맞은 사람이 되어 언제까지고 곁에 있고 싶다는 다짐의 태도이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발원의 작용이다. 이에 따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나머지 때로는 얼굴이 빨개지거나 말을 더듬기도 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안고 싶고 기대고 싶고 한, 사랑은 이 모든 육체적인 떨림과 끌림까지도 파생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사용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부단히 행동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이것은 절대적인 지(知)의 개념이 아니다. 단지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부분이고 어렴풋하게나마 사랑의 의미를 짐작한 정도를 의미한다.- 더욱 말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부끄럽게도 나 자신이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과 나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난처함이다. 나에게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 상태, ‘호(好)’를 의미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너를 너무나 좋아해서(好) 나는 ~하다.’를 넘어 ‘너를 너무나 좋아해서(好) 나는 ~하고 싶다.’와 같은 바람, 심지어는 ‘너를 너무나 좋아해서(好) 나는 ~할 것이다.’와 같이 어떤 의지의 표현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고백은 단순히 내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뱉은 말에 대해 책임질 것을 당부 받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사랑에 부응하는 자가 될 것! 그래서 나는 사랑을 고백해야 될 때면, (내가 내뱉은 말이 촉발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며 혼란스러운 양가감정 사이에서 유보의 전략을 채택해왔다.  


   내가 좋아해마지 않는 미드인 <빅뱅이론>에서 제일 민망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레너드의 고백 씬이다. 주인공인 레너드는 몇 년간의 짝사랑 끝에 페니와 사귀게 되고, 사랑을 나누며 극강의 행복감을 누리던 중 페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레너드의 고백을 들은 페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정말 놀랍게도 “고마워.”라고 대답한다. 페니의 대답이 레너드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 이해하면서도, 가장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페니의 두려움과 난처함에 깊이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 혼자서만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사랑한다고 소리 내어 고백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내 삶 속으로 기꺼이 초대하는 행위이고, 내 사람이라고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이고,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 앞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이 부정되지 않기를, 모든 마음의 준비가 끝났을 때 용기 내어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기를, 그 고백으로 인해 더욱 넉넉하고 풍요로운 인간 감정의 정수를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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