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이다. 그가 고등학생일 당시에 야간자율학습은 말이 자율이지 실제로는 자율이 아니었다. 전교생이 학교에 남아 10시까지 자습을 하던 시절에, 한 친구가 그에게 국어 지문에 대해서 질문을 했더란다. 어떤 작품인지 어떤 내용인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친구가 물은 건 어떤 소재였고, 하필이면 그 소재가 조팝나무였다. 소곤소곤 조용한 목소리로 조팝나무라고 대답을 하는 순간, 그날의 야자 감독 선생님께 그는 끌려가고 말았다. 아마도 조팝나무를 어떤 욕이라고 들으셨는지 어떠한 변명의 기회도 없이 사정없이 엉덩이에 매를 놓았다고 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힌 이유는, (미안하게도) 그 선생님에 대한 원망이나 그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가 바로 이 조팝나무의 변주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소통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공동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언어에 딸린 개별적인 정의 때문이다. 동일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사전에 정의된 뜻이 분명히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 다른 언어를 가진 존재이다. 가령 A에게 '실망했다'라는 표현은 '이번에 보여준 모습은 좀 아쉬웠다. 다음에는 더 잘해보자.'라는 의미라면, B에게 그것은 '너는 나의 모든 기대를 배반했다. 더 이상은 정이 떨어져서 보고 싶지 않다.'라는 의미일 수 있다. A와 B에게 '실망했다'라는 동일한 언어를 발화하더라도 전혀 다른 해석과 반응을 낳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C, D, E들은 A와 B가 내린 의미 사이에 위치한 어떤 변주들을 '실망했다'라는 언어에 부여할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면 소통의 완전성은 허상이다.
또한 각자의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아챈다 하더라도 각자는 각자일 뿐 서로가 될 수 없기에 소통은 실패에 가깝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서사와 취향과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가진 타자들이다. 해서 A가, B가 아는 어떤 언어로 자신의 상황을 전한다 한들 B는 A의 상황을 완벽히 동일하게 경험할 수 없으므로 B는 A가 전하고자 했던 바에서 동떨어진 어딘가에 서있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소통에는 오차의 범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자신의 몸에 갇혀버리곤 하는 것이다. 내가 체험할 수 있는 범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경계 안에서 뜨끈뜨끈 몸을 풀며.
'갇혀버리면 끝장이야.' 늘 생각한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중 김겨울 작가의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타자화하는 소통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일이기에 도리어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언어를 소개하고 표현하는 일에, 그의 언어를 탐구하고 그를 상상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기로 한다. 내가 하는 말을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그가 하는 말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조팝나무를 아무리 빨리 발음하더라도 조팝나무라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