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면 이제 귀신이 되어버리는
김복희의 시, '귀신 하기'를 읽고
얼마 전 시집을 뒤적이다가 김복희 시인의 '귀신 하기'라는 시를 읽었다. 목차에 실린 제목만 보고도 오싹한 기분이라 그 페이지만큼은 절대 펼쳐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래서 꼭 눈으로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 본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고 있었다.
'많이 좋아하면 귀신이 돼'
시의 매력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낯설게 끌어오는 데에 있나 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귀신이었다. 질리는 것을 잘 모르는 나는 매일 아침 사과를 먹어도 매일 맛있고 매일 아침이 기대되는 사과 귀신이다. 또 나는 떡볶이라는 말만 들어도 흥분하는 떡볶이 귀신이다. 또 나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는 체육관 귀신이다. 좋아하면 되어 버리는 귀신은 아마도 논리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 같다. 어떠한 반복도 지겨움을 유발할 수 없고 어떠한 장애물도 제약이 될 수 없는 극강의 호(好)와 행(行)의 상태. '나'가 아닌 좋아하는 대상에 방점이 놓이는 상태. 그래서 좋아하는 대상이 더 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로 군림하는 상태.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곧 귀신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좋아는 하는데 귀신은 되지 않으려고 그러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모양이 안됐다'
귀신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무언가를 좋아하면서도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선언 같았다.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정도와 경우를 따져가며 좋아하겠다는, '좋아함'이라는 감정과 행동의 주인 됨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특히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이규보의 '시벽'이 떠올랐다. 이규보는 '시벽'에서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를 '시마(詩魔)' 때문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시 귀신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아 날마다 몇 편의 시를 쥐어짜 내며 고생스럽게 살고 있으며 이 병을 어떤 의원도 고칠 수 없다며 시 창작이 자신의 의지와 상반된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지양한 나머지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무딘 애를 쓴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귀신이 되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가엾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면서도 귀신이 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그래서 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이를 보며 안쓰러운 서늘함을 느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누군가를 좋아하겠다고 맘먹고 그를 좋아하게 되는 일도 어려울뿐더러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여 그 마음을 조절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한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끈질기게 관찰하며 어떤 기미를 살피고 그것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주체성의 상실.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귀신이 되어버리는 일은 그래서 묘한 슬픔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