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눈 Dec 20. 2021

아모르파티, 아이처럼 놀이 하라.

첫사랑을 만난다면(소설_33)

그와 띄엄띄엄 문자를 주고받는 시간이 지나, 금요일 개강 총회 날이 되었다. 


저녁 7시, 지하에 있는 술집에서 교수님 네 분과 전 학년 학생들이 모였다. 전부 다 모여도 심리학과 강의를 듣는 사람보다 적은 30명 정도였다. 테이블 여섯 개에 모여 앉아서 교수님의 건배사로 개강총회를 시작했다. 교수님의 짧은 환영 인사가 끝나자 선우 오빠의 학과 일정 소개가 이어졌다. 선우 오빠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선우는 테이블 끝에서 고학번 선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혜지와 나는 교수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참 술이 들어가던 중, 박 교수님께서 날 보며 말씀하셨다.



“여름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술도 예전보다 잘 마시고. 예전에는 우리가 술을 권해도 거절하기만 했는데.” 옆에 계신 신 교수님께서도 그렇다며 동조하셨다. 



“제가 그랬나요? 그땐 제가 어렸나 봐요. 교수님, 한 잔 더 받으세요.”

“지금은 많이 어른스러워지셨나 봐요, 여름님.” 교수님은 내가 귀엽다는 듯, 맞장구 쳐주셨다.





초록색 병이 여러 개 쌓일 때쯤, 교수님께 넋두리를 했다.


“교수님, 삶이란 뭘까요. 대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요. 어차피 죽을 건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을까요? 우린 다 죽잖아요. 죽는다고요.”


“여름이 답지 않은 말이네. 늘 웃기만 해서 그런 고민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신 교수님께서 의외라는 듯 말씀하셨다.


“교수님, 전 진지해요. 우리는 모두 죽잖아요. 저는 죽음이 앞에 와있다는 게 무서워요.”

내가 진지하게 묻는다는 걸 눈치챘는지, 신 교수님께선 술잔을 내려두시고 말을 이으셨다.




“여름아,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단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죽으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는 젊은이가 자신의 삶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젊음을 지키는 일이라고 해.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의 삶을 즐기라고 말이야. 박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이지요. 여름아, 지난 학기에 배운 니체의 영원회귀 생각나니? 죽음으로 삶이 끝나진 않아. 우리는 죽은 뒤, 지금까지 살았던 삶을 그대로 또 산단다.”



“아니에요, 교수님. 끝이에요. 끝이라고요.” 죽은 뒤, 우리는 BCD카페에 가게 된다고. 그곳에서 한 여인의 말에 따라 1년을 더 살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 뒤엔 정말 영면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교수님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지. 죽으면 삶은 끝이 나지. 삶의 길이는 내가 태어나서 죽은 시간까지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한 시간이야. 우리의 삶은 죽은 후에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지. 


그래서 니체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면 내 인생 전체의 시간보다 훨씬 길기에,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단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고요?”


“그래. 그러니 이 순간을 또 겪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게 즐겨야 해. 이번 강의 첫 시간에 한 말 기억나지? 아모르파티.”



니체의 영원회귀. 대학원생일 때 지겹도록 배웠어도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다. 나에겐 1년이란 유예시간이 주어졌기에, 완전한 죽음 이후의 삶은 보지 못했다. 



1년이 지나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다시 같은 삶을 살게 된다라.

그렇다면 이 1년은 영원히 반복될 내 삶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 걸까.




“교수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영원히 살아야 할 이 삶을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요.”


“아이처럼 살아야지. 아이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아. 그냥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뿐이지. 아이처럼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겨야 해. 놀다 보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그 순간을, 그 인생을 사랑하게 되지. 아모르파티에서 아모르가 사랑이란 뜻이거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삶이야.”




옆에서 신 교수님께서 웃으며 핀잔을 주셨다.

“박 교수님, 술 마시는 자리에서까지 강의하면 애들 다 도망갑니다.”

“그런가요? 자중해야겠습니다.” 박 교수님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








“교수님, 저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내가 잠시 밖으로 나가자 혜지도 따라나섰다.





“여름아, 너 아까 그 질문 뭐야? 무슨 일 있어?”

“혜지야, 솔직하게 말할게. 나 사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 지난번에 네가 정문에서 본 유현이 생각나지? 유현이를 많이 좋아해.” 




혜지는 날 뭐라고 생각할까. 선우 오빠는 헤어지고 나서 나를 챙겨주라고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나를 나쁘다며 욕할까. 선우 오빠를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직설적인 성격의 혜지였기에, 긴장됐다.




“그랬구나.” 예상과 달리 혜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여주었다. 토닥거리는 규칙적인 진동이 위로가 되었다.

“… 선우 오빠 이야기는 안 물어봐?”



“난 선우 선배 후배이기 전에, 네 친구잖아. 아모르파티. 영원히 반복될 삶인데, 후회 없이 순간에 충실해야지.”그렇게 말하는 혜지가 고마웠다.




“고마워 혜지야. 그렇지, 순간에 충실해야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기쁜 일인데, 왜 그렇게 힘들어 보여?”



“그 사람 마음이 헷갈려. 날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 물론 아니라고 하면 괴롭겠지만, 어중간한 사이보다는 깨끗하게 정리된 관계가 마음 편하지 않아?” 혜지다운 깔끔한 방법이었다.




“그 사람이 내 진심을 알게 되면 멀어질까 봐. 이 사람 없는 삶은 생각하기조차 힘들거든.”


“친구로라도 남고 싶구나? 근데 칸트가 한 말 기억하지?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가라. 잘못과 실패가 있더라도 그것만이 빛을 보는 길이다.” 





그것만이 빛을 보는 길이라…. 내가 생각에 잠기자 혜지가 말했다.

“이제 들어갈까? 교수님 기다리시겠다.” 그녀의 말에 우리는 함께 계단을 내려가다 멈춰섰다.



“혜지야, 미안한데 나 먼저 가볼게. 갈 때가 있어. 개강총회 뒷 마무리 좀 부탁해도 될까?”

“갑자기 어딜 가려고?”

“네 말대로 용기가 생겼을 때 부딪혀 보려고.” 그런 나를 보고 혜지는 빙긋 웃었다.







시계를 보니 유현이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기 30분 전이었다.

“여름아, 웬일이야?” 카페에 들어서자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지나가다 들렸어요. 마감 청소 도와드릴까 하고요.”

“오, 그럼 나야 고맙지. 얘들아, 여름이가 청소 도와준대. 오늘은 좀 더 일찍 퇴근해도 되겠다.” 사장님께서 주방을 향해 말씀하시자 유현이랑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유현아, 오늘 일 끝나고 야식 같이 먹을래? 할 말도 있고.” 놀란 표정의 유현이를 보며 말했다.

“미안. 나 내일 아침 일찍 할머니 병원 가봐야 해서,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 해.”




“그래? 그럼 같이 퇴근하는 건 괜찮지?”

“응. 근데 너 술 마셨어? 얼굴이 빨간데.”


“얼굴 빨개? 에고 조금밖에 안 마셨는데. 내가 홀 청소 다 할 테니, 너도 커피머신 마감 얼른 해. 일찍 퇴근하자.” 



얼굴이 붉어졌다는 말에 화장실로 향했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얼마나 마셨지? 용기를 내어 그에게 왔는데 혹시 술주정처럼 보이진 않을까. 손에 물을 묻혀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정신차리자, 백여름.






매주 월요일, 목요일에 업로드합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직접 촬영, 핀터레스트

매거진의 이전글 왜 문자 할 시간이 없다는 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