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32_소설)
학과 사무실 앞에서 친구들과 해맑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유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현아, 나 심리학개론 신청했어. 혹시 모둠 과제 있어?’
‘응. 오늘 모둠 구성하긴 했는데, 수강 신청 변경 기간이라 목요일 되어야 확정될 거야.’
그녀가 말한 사람이 유현이일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그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겠다, 싶어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다. 몇 분 뒤 문자가 한 통 왔다.
‘여름아, 나 선배들이랑 이야기 중이라서 전화 못 받아.’
그는 이 문자를 끝으로 그날도, 그다음 날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낸 문자만 쌓여갔기에 핸드폰을 열 때면 한숨부터 나왔다. 내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일기장에 적었다. 우리의 대화를 복기하며 내가 말실수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그의 마음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님 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에게 내가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걸까.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긴장되는 마음으로 심리학개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의실 중간쯤, 유현이의 넓은 등이 보였다. 하얀색 이어폰을 끼고 있는 걸 보니 노래를 듣는 듯했다.
그때, 심리학과 사무실 앞에서 본 검은색 긴 머리 여학생이 유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유현이는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작고 예쁜 입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선 싱긋 웃었다. 여자인 나도 반할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나.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게 되니 몸이 굳어 강의실 뒤편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 뒤로 학생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바람에 등 떠밀려 유현이의 뒤통수가 보이는 곳에 가방을 내려두고 앉았다.
여학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종알거렸다. 그녀 앞에 앉아있는 유현이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 걸까.
교수님이 들어오시자 그녀는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를 쿡쿡 찌르며 꺄르르 웃었다. 여러 친구와 함께 강의를 듣는 걸로 봐서 심리학과 학생임이 분명했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자 유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내 핸드폰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여름아, 수업 시작했는데 어디야? 늦어?’
‘나 강의실인데.’
속상한 마음에 딱딱하게 답장을 보내고 고개를 숙여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심리학과 전공 서적을 읽는 척했다. 유현이는 아마 나를 찾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겠지. 30살이 넘어서 이러는 내가 참 초라했지만, 서운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교수님께선 수업의 개요를 설명하시고선 4명씩 자율적으로 모둠을 구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리학과 여학생이 일어나서 유현이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내 앞줄에 앉은 남학생 2명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타과에서 오셨나 봐요? 저희는 심리학과 3학년인데 같이 모둠 과제하실래요?”
유현이가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니 울컥하기도 했고, 그들 앞에서 너무 오래 고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럴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함께 해서 좋다며 다른 한 명을 더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유현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여름아, 여기 있었네. 왔으면 전화하지 그랬어. 모둠 과제 같이 하자.”
네가 문자 한 통 없는데 내가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또 먼저 전화를 하니, 라는 날 선 말이 튀어나갈 뻔했지만, 꾹 눌러 참으며 이야기했다.
“나 이분들이랑 같이 하기로 해서.”
“아….” 유현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저도 같이 해도 될까요? 타과생이지만 피해 주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심리학과 학생 둘은 조금 찝찝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본과 수업인데 다른 과 학생이 둘이나 있으면 아무래도 자신들이 감수해야 할 것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관계가 묘해 보이는 남녀가 함께 하게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그 여학생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유현 오빠, 다른 팀원 구했는데 같이 가요.”
“가을아, 이 분 우리랑 같이 하기로 했는데?” 내게 말을 걸었던 심리학과 3학년 남자분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사람 이름이 가을이구나. 계절 이름이라 기분이 묘했다. 유현이는 내 이름을 특별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저 사람에게도 특별한 이름이라고,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했을까. 하루 만난 사이일 텐데 자연스럽게 유현 오빠라고 하다니. 유현이가 다정하게 했으니 그녀가 기대하며 친구들에게 유현이 이야기를 했던 거겠지? 가슴이 돌덩이가 앉은 듯 답답했다.
“네? 선배들 너무해요. 제가 먼저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랬어? 그럼 네가 같이 할래? 우리가 다른 사람 찾아보지 뭐.” 그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안 된다. 모둠 과제를 하다 보면 수업 시간 외에도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많아지지 않는가. 그것만은 안 된다.
“아, 저는 3학년 선배들이랑 꼭 같이 하고 싶은데요.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서요. 저희가 잘할게요. 그렇지 유현아?” 내가 다급하게 외치자 유현이는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가을씨, 죄송해요. 가을씨는 본과라 친구들 많으니 저보다 더 좋은 팀원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유현이는 그녀에게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가을씨, 가을씨.
나와 함께 모둠 과제를 한다고 했지만, 가을씨라고 부르는 유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도 저 이름을 잊기 힘든데, 유현이도 계속 생각이 나겠지. 게다가 저렇게 아름다운걸.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대신 다음에 밥 한 번 먹어요.” 그녀는 대답을 듣지 않고 싱긋 웃으며 뒤돌아섰다. 참 매력적이다. 구차하게 붙잡지 않고 당돌하게 다음 약속을 잡고 돌아가다니.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유현이를 바라보았지만, 유현이는 별 생각이 없는지 교수님께서 모둠 과제로 내 준 종이를 살펴볼 뿐이었다.
“여름아, 수업 끝나고 뭐해?”
“나 12시 전공 수업 가야 해.”
“이 수업 듣고 바로? 너무 빠듯한 거 아냐? 점심도 못 챙겨 먹겠네.”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일주일에 2번, 주기적으로 유현이와 만나고 싶었다. 어제처럼 그가 문자에 답장을 계속 안 하면, 볼 수 없지 않은가.
“아냐. 공강 시간 있는 것보다 쭉 이어 듣는 게 편해.”
“그렇구나. 어제는 답장을 못해서 미안. 선배들이랑 상의할 게 많아서. 학기 초라 조금 바빴어.”
“아냐, 바쁘면 문자 못하는 게 당연한 거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지만, 내심 아무리 바빠도 문자 한 통 할 시간도 없냐는 물음이 마음을 헤집고 다녔다.
결혼을 약속했던 태형 씨도 그랬다. 바쁘다며 하루 종일 연락을 못할 때가 많았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화장실은 가지 않나? 근데 왜 문자 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지.
그때도,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꼬치꼬치 캐묻는 건 매력을 떨어트린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너그러운 척, 이해하는 척했다. 그의 사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연유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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