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에서 남영동, 후암동, 용산동까지
부쩍 추워진 날씨. 아침이 쌀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기예보를 보니 오전 10시 기온이 2도다. 잠시 집에서 보내는 일요일을 생각했다가, 이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 춥다고 게으름 피우면 12월, 1월에는 할 말이 없어질 테니까.
오늘은 멀리 나가지 않고, 가방도 없이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용산구다. 서울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거주한 지역이기도 하다. 스트릿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은 사는 곳이 꽤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자주 오며 가는 곳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아무래도 많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무척이나 만족한다.
청파동, 남영동, 후암동, 용산동 일대는 걷기 편하게 자연스레 연결돼 있다. 길게 늘어선 도로를 따라 걸어도 좋고, 워낙 골목이 많은 동네니까 보이는 골목골목으로 발을 성큼 떼어보기도 한다. 그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걸었을 것인데도, 걸을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만난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한다. 사물의 위치는 변화한다. 거니는 사람들은 매번 달라진다. 하물며 사진가 자신도 어제와 오늘이 다른 존재다. 그래서 스트릿 사진가가 매번 다시 걷는 것은, 그 공간을 언제나 최초로 방문하는 것이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가장 처음 누가 이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다. 빛 또한 시시각각 변한다. 그렇게 저 말에 빗대자면, 사진가가 찍기로 결정한 순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인 것이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
그저 지나치던 가게 유리창도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날이 있다.
지나가면서 자주 눈길이 갔던 건물. 보면 볼수록 신기한 건물이다.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도시 건축을 여행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걸으면서 독특한 외관을 한 건물이 있다면 그저 지나치지 말자. 눈길이 가는 대상이 있다면 의심하지 말고 꾸준히 찍어보자. 훗날 자신만의 특별함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개가 오는 줄 모르고 벽을 찍고 있었다. 이런 순간은 선물과도 같은 순간이다. 고양이를 얻으려다 개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귀여운 시츄가 나타날 줄이야. 어렸을 적 집에서 시츄를 키웠었는데, 충분히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평생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TT
청파동 자주 지나던 거리. 이곳에 카페가 있는 건 처음 본다. 강렬한 터치의 페인팅이 벽에 걸려 있고, 문 앞에서는 고양이가 서성이고 그 고양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서성이고 있다. 한적한 오후의 느긋함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걷다 보면 느닷없이 소파가 자리 잡은 공간들이 자주 발견된다. 누군가 저기 앉고 싶어 가져다 놓았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처치 곤란 소파를 "버리느니 놓지 뭐." 하면서 그럴듯한 곳에 가져다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이든 조금은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이름 모를 쉼터'들은 내 SD카드에 차곡차곡 담겨있다.
도시의 기호와 상징들은 나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이다. 디자이너의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는 건물 외벽이나 간판에 실체화되어 나타나고 그것들이 하나 둘 모여 도시의 분위기와 뉘앙스를 만들어간다.
이런 디자인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도시를 걷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장면들. 직관적인 일러스트 하나로 명료하게 표현했다. 모르긴 몰라도 디자이너분 표어 대회 수상 경력이 꽤나 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고꾸라진 산타는 아마도 12월부터 왕성한 힘으로 활약하며 도시를 거니는 이들의 이목을 끌 것이다.
이렇게 동네에는 코끼리도 있었고.
뒤집어져 한껏 더 귀여워진 바스켓도 있었다.
집 앞에는 비행기도 있었다. 이사 온 지 네 달이 다 되어가는데, 오늘 처음 봤다. 인근에 항공학교가 있다.
고양이에게 1만 보 걷기 쯤은 아무 일도 아니겠지. 이렇게 이번 포스팅에도 개와 고양이가 모두 등장했다. 엄연한 스트릿 사진의 중요한 일부.
그래서 오늘은 새까지 준비했다. 도시 사진에서 사랑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전신주인데, 새가 있으면 좀 낫다. 아니, 이 사진의 경우는 오히려 새만 있었다면 밋밋할 뻔할 수 있었는데 형태를 이룬 전신주가 사진의 구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줬다.
9천 보쯤 되었을 때, 집 방향으로 향하면서 남긴 사진.
어떤 연유로 해열제라는 단어를 그래피티 했는지 알 수 없다.
남영동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병원.
따뜻한 술, 차, 음료가 손이 더 가는 계절이 되었다
러닝 할 때 신는 신발을 신고 걷는다. 스트릿 사진가는 편안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주의. 오래 걷고, 편안히 걸어요 우리. '가을의 끝물'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며 찍었던 사진이다.
후암동에서의 사진을 끝으로. 12월의 거리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해 본다.
정확히 일만 보를 걸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흑백 사진은 원본입니다.
@sancheck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