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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 Mar 18. 2024

잡놈이 되자

대학 강의를 듣고 한 다짐



이번 학기 <한국문학과동아시아문학>이라는 강의를 듣고 있다. 매주 단편 소설 하나를 읽고 A4 1~2장 분량의 글을 제출해야 한다. 7일마다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정돈된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 과제 지옥에 스스로 굴러들어오는 학생은 많지 않으므로 오리엔테이션 날 모인 인원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교수님은 출석부에서 학생들을 차례로 호명하며 왜 이 수업을 듣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로 말하자면 문학적 호기심이나 매주 글을 써야 하는 강제성이 부과됨에 앞서 강의평이 너무 좋기 때문이었다. ‘매주 글 쓰는 게 힘들긴 하지만 얻어가는 게 많은 인생 강의’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문학 좋아하면 꼭 들으세요’라는 말도······. 그래서 듣게 됐다. 교수님께는 한국 문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 듣게 되었다고 했다.


강의실 오른쪽 구석에 몰려있던 유학생들에게 마이크가 넘어가자 교수님은 딱 잘라 말씀하셨다. 이 수업은 듣기 어려울 거라고, 본인 수준에 맞는 강의를 찾아가길 권한다고. 그렇게 유학생들까지 빠져나간 강의실은 더 넓고 썰렁해졌다. 학생 수는 이제 열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교수님은 오리엔테이션을 한 그날부터 과제를 내주셨는데(이때 빠져나간 인원도 꽤 되는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기완>을 보고 이틀 뒤 있을 수업 전까지 감상문을 제출해야 했다. 과제를 하는 건 본인 선택이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말에 오기가 생겨 이다음 수업 날 밤을 새고 영화를 본 뒤 학교 가기 2시간 전부터 글을 썼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써온 글 가운데 몇 개를 뽑아 발표시켰다. 발표자로 지목되면 자신이 써온 글을 학우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어야 했다.

                    

‘로기완’이라는 인물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한 학우의 글을 발표시킨 뒤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연민이나 동정은 조심히 다뤄야 할 감정이라고. 대상을 향한 <우회적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그제야 나는 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지지하는 (듯한 모양새의) 글에서 이따금 거부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연민의 태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런 글에는 동정하는 대상을 향한 작성자의 우월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 문장을, 글을 쓴 적이 없나?

생각하고 반성하기에 앞서 실체가 느껴지지 않던 불편함의 적확한 표현을 만났다는 기쁨과 놀라움이 가득 차올랐다.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이었다.


영화 <로기완>의 원작인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민 로기완이 중국에서 공안의 눈을 피해 살다가 잡힐 위기에 처하자 벨기에로 넘어가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것을 한국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교수님이 물었다. 글쎄, 주인공이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는 작품의 주요 무대로 한국이 나오지조차 않는데 이걸 한국 문학이라 부를 수 있으려나? 교수님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러한 작품을 <월경하는 문학>이라고 지칭하셨다. 월경하는 문학, 상상력, 경계를 넘어서는(메모장에 이렇게 남겨져 있었다)······. 교수님에게서 쏟아지는 근사한 표현들을 주워 담느라 내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주제로 넘어와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은 품격과 격조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과 영화와 예술을 향유해야 한다고.



그 밑에는 이런 메모와 단상들이 적혀 있다.


욕망의 포트폴리오

욕망의 집 / 관계의 집짓기

목표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제일 무서움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 한국 교육의 문제점

ㄴ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함

권력의 하수인

구조주의 철학

<잡놈이 되자> 국문학과 표어



국문학과가 아니므로 마지막 문장이 정말로 학과 표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다짐했던 것 같다. <잡놈이 되자>고 말이다. 교수님은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만큼 무서운 건 없다고, 학창 시절부터 눈이 맞아 일생에 한 명의 연인만을 사귀어 온 사람만큼 안타까운 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사람은 잡놈적 인간이 되기 위해 이질적인 여러 욕망을 엮어 욕망의 집을 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이셨다. 나로 말하자면 하나의 목표만을 좇기보다 목표가 없는 쪽에 가깝고 한 명의 연인을 진득하게 사귀는 편은 더더욱 아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잡놈적 인간이 될 만한 조건은 이미 갖춘 사람처럼 보였다.


살면서 <잡놈>이라는 말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교수님은 앞서 말한 하나의 목표, 한 명의 애인만을 가진 ‘순수한 사람’이기보다 잡스러운 놈, 다시 말해 융합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태어나 한 번도 스스로가 순수하다고는 생각한 적 없으므로 역시 (잡놈이 되기 위한) 조건 통과.






교수님은 순수한 사람들을 가리켜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낭만적’이라는 말은 영어로 Romantic. 교수님은 Roman(로망)에 동그라미를 치더니 이것이 로마에서 기원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럴 수가! 로마는 어쩜 어원부터 이토록 낭만과 사랑이 넘치는가. (참고로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 즉 사랑이다) 교수님은 낭만적이다, 라는 말이 따라서 로마스럽다, 와도 같은 말이며 이것은 다시 문명스러운, 고전, 이성, 합리, 체계와 연결된다고 지적하셨다. 비-로마적인 건 당시 로마의 적이었던 프랑스를 주로 가리켰다며. 지금에야 프랑스는 낭만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극도의 인공미를 추구하는 프랑스의 정원 같은 것을 생각하면 자연의 태도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낭만적인 태도라고 지적하신 교수님의 말이 다시금 와닿는다.


수업의 끝에서 교수님이 물었다. 우산을 쓴 사람이 더 낭만적이에요, 아니면 안 쓴 사람이 더 낭만적이에요? 학생들이 답한다. 안 쓴 사람이요. 나는 교수님 덕분에 조금 낭만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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