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노래
향수가 담긴 음절이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남아있는 추억이 있다는 사실의, 그 든든함이란.
깊은 밤 아름다운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물들이고
영원한 여름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어요
아이유의 '꽃갈피' 음반에 수록된 <여름밤의 꿈>이다. 원곡자는 김현식 선생님인데, 아이유의 부드러운 감성으로 편곡되어 재탄생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스무 살, 첫 여행지인 엘에이의 장면들을 가지고 있다. 설렘에 잠 못 이루던 그곳에서의 새벽, 친구들과 놀고 싶어 낯선 교회에 출석하여 알아듣지도 못하는 낯선 영어 설교를 듣고는 아멘-을 외치던 순간, 단순한 매너에도 마음 졸였던 장면, 레돈도 해변에서의 아련한 일몰 등.
랜덤 재생을 하다가 이 노래가 나오면 나는 스무 살의 여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랑아 왜 도망가 수줍은 아이처럼
행여 놓아버릴까 봐 꼭 움켜쥐지만
그리움이 쫓아 사랑은 늘 도망가
잠시 쉬어가면 좋을 텐데
엘에이에서의 기념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노래다. <여름밤의 꿈>이 귀엽다면 로이킴의 <사랑은 늘 도망가>는 '진짜'다. 이 노래는 몽골이 남긴 노래다. 사실 그곳에서는 이 노래를 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로' 남겨진 노래다. 몽골에서 만난 인연과 헤어지고 난 직후에 들었던 사랑 노래 아니, 이별 노래다. 이후에도 절절한 이별노래를 많이 들었지만, 이 노래만은 몽골의 기념품 중 단연 첫 번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파 때문에 구체적인 감정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이제는 이 가사에 이입이 잘 안 될뿐더러 살짝은 (미안하지만)이 가사에 이입했던 먼 과거의 내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풍파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장면만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
짧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절절한 이별노래에 공감했던 새벽 말이다. 유난히 파란 몽골의 하늘과 왕성한 초록, 뭉게구름처럼 피어난 사랑의 모습과 대비되는 <사랑은 늘 도망가>의 가사를 이해했던 칙칙한 새벽, 내 자존감만큼 작았던 원룸방이 기억난다.
다행인 점은 부정맥을 일으킬 것 같은 절절한 이별 노래들이 한껏 휘몰아치고 난 후에, 더 이상 그런 감정이 기념품으로 남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노래를 기념품이자 행갈피로 가져오는 행위는 꽤나 심장 건강에 좋지 않으니 말이다.
떠밀리듯 하루가 시작되고
변함없이 씩씩한 척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밤이 왔네
깜깜한 밤
우우우- 어두운 마음은 오늘 밤 지나갈 거야
우우우- 빛나는 곳으로 오늘 밤 갈 거야
앞의 두 노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노래다. 이 곡은 배우 김고은의 <어두운 마음은 오늘 밤 지나갈 거야>다. 덤덤하고 단순한 음에 담담한 가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조합이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노래는 작년 가을, 학회 참석 차 방문한 런던과 파리의 기념품이다. 당시 나는 마음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회사에서 거는 기대감이 나를 뭉근히 짓누르고 있어 유럽행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스스로를 풀어낼 수 없는 시간을 건너며 새벽에 감흥 없이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 역으로 향할 때, 랜덤 재생으로 <어두운 마음은 오늘 밤 지나갈 거야>가 나왔다.
참담한 마음에 담담한 위로가 되었던 그 새벽의 어스름이 기억난다.
작아지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겠지만
언젠가 우리 이렇게 서로를 보며
웃어볼 수 있도록
이 시간이 지나가면 모든 걸 알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나에게
잘해왔다고 수고했다 말할래
마지막 곡이다. 나상현씨밴드의 <주인공>.
퇴사 후 첫 여행의 노래다. 물론 퇴사 후에도 여전히 마음은 어려운 상태였고 혼자가 아닌 어른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약간의 책임감이 더해져 설렘이 아닌 싱거운 마음으로 인천공항행 공항철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적적한 역사 내에서 이 노래가 랜덤 재생되었다.
고요함 속에 서 있던 칙칙한 나를 흥겨운 음절들이 순식간에 휘감았다. 축축이 젖어 풀이 죽은 마음을 급속 건조해 보송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후로 그 여행에서 마음이 어려워지는 순간마다 <주인공>이라는 건조기 속에 들어가 음절에 마음을 맡겨 마구 뒹굴고 보송한 마음으로 현실로 회귀할 수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미리 노래를 선정하기도 해 봤지만, 그런 노래들은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행갈피가 되지 못했다. 헌 느낌이랄까.
이런 가성비 좋은 기념품을 남겨오는 여행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노래 기념품이 남지 않은 몇몇 여행들이 생각난다. 분명 뇌리에 남는 기억이 있는 여행들이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노래 기념품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든다. 다음 여행에 간택되는 한 곡은 무엇일지.
다음 여행이 선택하는 노래는 무엇일까.
떠나야겠다.
추신 - 여러분의 노래 기념품과 그에 담긴 추억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