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맥주
맛있는 술은 뭐니 뭐니 해도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다.
고된 하루를 안주 삼아 차가운 맥주를 넘기면 식도와 위장의 실루엣을 그려내며 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감각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살았구나- 하는 것이다.
전업 작가가 된 지금은 '퇴근 후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고된 하루'라는 안주도 없다. 때론 글이 잘 팔리지 않아 속상한 날도 있지만 좋아하는 일로 고생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지 않기 때문에 요즘의 안주는 일전의 '고된 하루'라는 안주보다는 순한 맛, 내지는 착한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술을 즐기는 나로서는 참으로 비통한 일
까지는 아니다.
그 거친 날들이 전혀 그립지 않다. 훠이
맛있는 술은 다양한 방법으로도 충분히 접할 수 있더라.
헌데, 그러려면 멀리 가야 한다.
중간에 한눈팔지 말고 주인장의 글을 잘 따라오시길.
학회 참석 차 떠났던 영국 런던이다. 영국은 맥주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인당 연간 소비량이 많고, 펍(PUB) 문화가 발달되었다. 는 사실을 익히 들어왔다. 실제로 어디를 가든지 펍이 있었고, 현지사람들로 판단되는 무리들이 한 손에 맥주 한 잔을 든 채 매장 안과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서 딱 봐도 손의 온기 때문에 미지근해진 것 같은 맥주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기 때문에 현지사람들일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밖에서 마실 정도로 맥주에 진심일 수 있나?- 하는 경외심과 약간의 부담스러움이 들 때 즈음, 그렇게 서서 먹는 게 그들만의 전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펍 앞을 가득 메운 익숙지 않은 그 ‘진심들’ 때문인지 쉽사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숙소에서 팀장님과 캔맥주를 마셔댔다. 그러다, 학회 이틀 차에 거래처 사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밖에서 맥주 한 잔 하자는 연락이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결정은 팀장님의 몫,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 앞 펍으로 나갔다.
무리 지어 밖에 서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사람들이 내부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공갈빵을 먹는 기분이었다. 보아하니 '핫'한 청년층은 밖을 지키고, 축구팬이나 장년층은 안 쪽에 앉아있어, 엇 죄송하지만 저만 나가서 마시겠습니다-를 속으로 외쳤다. 그곳이 무서운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안 후에 다른 펍들을 방문해 보니 안과 밖은 그저 기호 차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펍의 장벽을 허물어준 소중한 경험이다.
수십 가지 종류의 생맥주 꼭지들을 보며 어버버 거리고 있던 차에 거래처 사장님께서 '런던 프라이드'라는 맥주를 추천해 주셨다.
가히 놀라운 맛이었다. 첫 입에 홉의 풍미가 강렬하게 불어오는데, 부드러운 목 넘김 후에도 찝찝한 알코올향의 방해 없이 그 풍미가 이어졌다. 두 모금, 세 모금 연달아 마셔도 불필요한 탄산 때문에 목이 따갑지 않고 기분 좋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시원한 얼음 맥주가 최고라고 생각하던 고정관념을 타파해 준 것이 런던프라이드의 첫 번째 공이고, 늦은 밤 밖으로 불러내 재미없는 이야기를 가득하는 거래처 사장님을 바라보는 눈빛을 촉촉하게 만들어준 것이 런던 프라이드의 두 번째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날 후, 팀장님과 나는 펍을 즐기게 되었다. 바로 다음 날 방문한 펍에서는 기네스 흑맥주를 마셨는데, 그게 또 기가 막혔다. 세 모금, 네 모금을 연달아 마시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목 넘김에 커지는 동공으로 찬사를 보냈고, 흑맥주 특유의 씁쓸한 풍미와 고운 거품이 조화를 이루었다.
런던을 떠나 파리에서 마신 맥주는 런던의 그것보다 한참 부족하다며 팀장님과 입을 모아 말했다. 만, 파리의 술은 다른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대체 불가한 분위기의 맛이 있었다. 에펠탑 아래 잔디에 아무렇게나 앉아 감미로운 버스킹을 들으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알딸딸하게 취해가는, 프랑스 파리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 말이다. 그저 그런 알코올을 넘기며, 분위기에 취하는 건지 술에 취하는 건지 모를 때즈음 팀장님과 남은 술을 싸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에펠탑의 풍미, 도통 뭐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감미로운 팝송의 풍미. 영국의 맥주와 당당히 겨룰 수 있을 만큼 강한 한방이다.
가장 맛있는 술, 가장 맛있는 맥주를 고르려다가 생각한다. 가장 맛있는 것을 골라두는 건 좋지 않다고 말이다. 최고를 골라버리면 그 외의 다른 맥주들은 열등한 것들이 될 테니까. 나는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글 한 꼭지를 쓰고 냉동실에 넣어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는 것도 런던의 맥주, 에펠탑의 샴페인이 해소해 줄 수 없는 류의 청량감을 주니 말이다.
이 글을 쓰니 맥주가 고프다. 이 글을 발행하고 난 후 한 모금 들이키는 상상을 하니 타자를 치는 손이 점점 빨라진다.
오늘의 안주는 고된 하루? 상사 헌담? 아니 짭조름한 감자칩이다.
나는 이제 그런 거 없어도 잘- 마신다.
나는 이제 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