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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Jan 15. 2024

우리는 마치 창 밖의 참새처럼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아오마메 씨 내면의 사랑이 손상되는 일은 없어?"

 아오마메는 말했다.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멋있다." 아유미는 말했다.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라."

 그리고 잔에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

.

.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나는 나를 기다리는 보노보노의 모습을 별 무리 없이 그려낼 수 있다. 십중팔구, 아니 십이면 십 모두 같기 때문이다. 그는 춘천에 살아서 우리는 자주 춘천의 기차역에서 만나는데, 역을 빠져나가는 인파 사이에 우뚝 서있는 퉁퉁하고 둥글둥글한 것을 좇으면 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통로의 가장자리에 서서 뒷짐을 지고 골반 너비만큼 발을 벌린 채 천천히 뒤뚱거리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안정을 찾아내면 다름 아닌 그라는 사실이 자주 위태로운 나에게 안정을 준다. 그도 멀리서 나를 알아보곤 살금살금 웃으며 뒷짐을 풀고 팔을 벌린다. 안기라는 뜻이다. 나는 당연한 순리인 것처럼 그의 품에 안긴다. 또는 때때로 약간의 변형을 일으켜 서로 모르는 척 지나가기도 한다. 지나가는 행인 1, 2를 연기하는 것이다. 나와 보노보노는 그런 우스운 장면을 여러 장 만들어냈고 그런 장면을 꺼내보는 순간마다 나는, '진짜 존나 좋다. 존나 좋아!'하고 이마를 부여잡는다.


기차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의 음절 또한 불러낼 수 있다. 개중 가장 좋아하는 건 내가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가 부르는 노래인데 이것 또한 우습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이 노래는 평소 보노보노의 묵직한 음색과 다른 얄팍한 콧소리와 독특한 코드로 '보~시~~ 보~시~~ 여보~~~시' 한다. 여보세요-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몇 해 째 그가 미는 유행가이다. 이 자체로도 우습지만, 그가 은근히 이 유행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최고 우스운 포인트이다. 우리는 이런 유행어를 서로 경쟁하듯이 만들어냈는데 너무나 우습고 남들이 보기에 눈꼴 시리 울 수 있어서 이 외의 것들은 그저 둘만의 유행어로 함구할 것이다. 이 우스운 노래가 생각날 때마다 '진짜 진짜 존나 귀엽고 존나 좋다!' 하는 걸 보면 보노보노와 나는 미치도록 잘 맞는 구석이 있는 가 생각해 본다


한 번은 집 근처의 개울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하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인삼각을 연습했다. 이인삼각의 고급 기술인 '발 바꾸기'도 연습했다. 주거지역이어서 주변에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았는데 아랑곳 않고 방방 뛰며 이인삼각을 해댔다. 언젠가 커플 장기자랑에 참가하게 되면 이 이인삼각 발 바꾸기를 보여주자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키득거리며 인파 속을 헤집었다. 이후에도 자주 이 장기가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드문드문 연습했고 또 그때마다 키득거렸다.


역시 잠들기 전에 생각나는 건 그와 불렀던 노래다. 나는 노래 가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데 그는 그 점을 집요하게 잡아내 놀려대곤 했다. 대표적으로 싸이의 '어땠을까'가 그렇다.

우리는 마치 창 밖의 참새처럼
잠들기 싫어하는 애처럼
초등학생처럼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못 듣게
귓속에 말을 해

이 중 나는 '아무도 3 연타'의 순서를 매번 헷갈리고 그러면 그는 무조건 이 대목에서 깔깔 웃는다. 많은 밤에 그와 백 번은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못 하는 혹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 나와 극기훈련 교관 흉내를 내며 '다시!'를 외치는 그. 우스운 둘은 '창 밖의 참새처럼' 또는 '잠들기 싫어하는 애처럼' 혹은 '초등학생처럼' 키득거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든다.


그와 함께 한 많은 우스운 날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나는 웃다가 웃다가 결국 울음이 나온다. 어쩌면 우스운 감상이라는 것이 애틋함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가 아닐까. 많이 애틋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이제 나는 매번 혼자 울고 그러다 혼자 잠들고 매일을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나를 이루는 일부라는 것에 몹시 고마워하며. 오랫동안 함께 우스운 날들을 만들어가자는 다짐으로 그의 등을 밤새 쓰다듬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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