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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A Sep 26. 2021

[남편이 죽었다.]

KUA Conte #12 :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 에드!! 에드!!


나는  다 늙어빠진 손아귀에 온 힘을 실어 쓰러진 그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미동이 없다.


“ 에드으으ㅡ!!!!  제발 좀 일어나봐요!!


코에 손을 대보니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2m 장신인 그의 팔과 다리를 잡아 바닥에 제대로 뉘었다. 여든다섯의 나이라 어느 곳 하나 성한 곳 없이 노환이 올대로 와버렸다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리러 스튜디오에 가는 그는 괜찮을 것이다 여겼는데.. 저녁이 다 되어서도 집에 오지 않아 스튜디오에 와보니 다 식은 몸뚱어리만 덩그러니 있고 그는 가버렸다.


병원에서는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결론을 내렸고, 장례식엔 그의 그림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우리가 함께 살았던 맨해튼에서 멀지 않은, 에드워드가 태어난 뉴욕시의 북쪽 끝 작은 마을에 그를 되돌려주듯 땅에 묻고 나니 없던 정신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래, 그 나이까지 살았으면 된 것이지’ 하고 사십 년 넘게 같이 산 남편이 좋은 곳으로 떠났다고 생각하면 좋으련만 내 마음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시끄럽기만 하다. 지난날 그와 함께 겪었던 기쁨들, 그가 떠났다는 상실감과 슬픔, 애정과 증오까지. 그 모든 것이 소용돌이 치듯 뒤섞였다. 곧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에드워드가 날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머리끝까지 화나는 감정이 나를 뒤덮으며 그와 대립했던 순간들이 하나 하나 떠올랐다.


’나의 그림'이 올라가기로 했던 브루클린 뮤지엄에,  ‘나의 추천으로' 그의 그림을 함께 올린 덕분에 그가 세상의 빛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내가 화가로 살아가는 것을 지겹도록 질타했다.


“ 아니, 당신 그림은 정말 우스꽝스럽다니까?


“ 뭐라는 거야!  내 그림이 우습다니!!


“ 여자란 자고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 세상에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런 볼품없는 작품을 그리는 것은 낭비야 낭비!


 에드워드는 정말 고지식했고 보수적이었다. 소심했으며 비판적이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친구도 없고, 어딜 나다니지도 않았다. 나와 하는 여행, 나와 하는 외식, 그림을 그리러 스튜디오와 집을 오가는 하루하루가 그에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끔은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그가 나와의 다툼을 통해 인생의 자극을 느끼고 싶은 건가 라는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그는  내 스튜디오에 방문하던 친구들도 모자라 내가 키우던 고양이까지 질투하며 미워해 집에 오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고양이와 친구들이 있는 스튜디오에 가서 살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또 하루는 내가 ‘여자' 인데도 운전대를 잡았다며 차에서 내친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자 모델이 필요할 땐 꼭 나를 찾았다.


“ 거기 앉아볼래? 응, 거기 그 빛을 받으면서 앉아 있어 봐.


“ 이렇게?


“ 아니, 무릎을 좀 굽히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놓아봐. 시선은 정면으로-


“ 정말 가지가지 하시네요, 이렇게 하란 말이야?


“ 응, 그렇게.


내가 모델로 서주면 고맙게나 생각할 것이지, 주문하는 것도 참 많았다. 그런 세세한 주문들은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될 때가 많았지만, 그는 결코 그림을 허투루 그리는 법이 없었다. 여러 장의 종이에 스케치했고, 또 그 스케치를 고쳤고, 빛을 어디에 둘지, 무슨 색을 둘지 정확하게 계산한 다음에야 캔버스에 그림을 옮겨 그려나갔다.

에드워드 호퍼 < Morning Sun>,1952 스케치


그렇게 그린 완성작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남편으로서는 참으로 미운 점들이 많았기에 인정하기 싫었지만, 화가로서의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모델로 있던 나를 그렸지만, 이면에 자기 자신을 그렸고, 또 우리가 살던 시대를 그렸다.


에드워드 호퍼 < Morning Sun>, 1952


젊은 날을 보내고 예순이 훌쩍 넘어 고독함을 마주한 나.

그리고 나와 결혼했어도 마음 한켠은 늘 고독했던 그.

누구나 느껴봤을- 대도시의 화려한 길거리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마주하는 적막함.


처음 내가 휘트니 뮤지엄에 내 그림을 전시했던 때에도 그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그림은 함께 있었다.  휘트니뮤지엄 이라니! 전시회 날, 난 가슴이 벅차 올라있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 조세핀 니비슨을 걸고 전시를 했으니, 그 어떤 화가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벅참은 잠시였다. 나의 첫 개인전에 축하의 말들을 건넨 사람들은 곧 내 그림들과 함께 전시했던 에드워드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었다.

에드워드 호퍼 <New York Movie>, 1939 

난 그때부터 조금씩 그림은 뒤로 한 채, 에드워드와 관련된 일들을 더 많이 해나갔다. 내향적인 그를 대신해 그의 그림에 관해 설명하고, 판매가 성사된 이후의 업무를 진행하고, 그의 그림의 모델로 서 있기까지 했지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유지했던 ‘니비슨' 이라는 성도 다른 여자들처럼 남편의 성을 따라 ‘호퍼’로 바꿨다.


그때 난 나를 버린 것이었을까?


남편만 좋자고,

남편이 싫어하는,

내 평생을 함께한 화가라는 직업을 놓아버리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이었을까?


당시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던 일들과 나의 행동들이 불현듯 의문을 자아냈다. 그리고 다시금 현재의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니 여든넷의 늙은 미망인이 서있다. 좀 더 찬찬히 생각해본다. 나와 에드워드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나마저 죽고 나면 이 모든 것들을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외딴 이의 손에 맡겨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가 마지막 숨을 거둔 스튜디오에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앉은 자리 앞 이젤 위 캔버스에 색칠이 완전히 다 끝나지 않은 그림부터, 언제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들이 여기저기 벽에 세워져 있다. 그림들은 하나같이  ‘에드워드 호퍼가 그렸다.’ 싶은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다. 


그 끝 없는, 이름 모를 고독함이 붓칠 하나하나에 깃들어있다. 

그리고 그 고독함과 함께 있던 창들, 

그리고 창으로 새어 나오는 빛들.

<Hotel by a Railroad>, nda
<A Woman in the Sun>, 1961
<Office in a Small City>, 1953

에드워드와 나, 조세핀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들처럼 말이다. 고독함이 빛을 이길 수 없듯, 빛이 고독함을 뚫고 지나갈 수 없듯,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나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사십 년이 훌쩍 넘는 그 긴 결혼생활 동안 고독한 그의 삶에서 빛으로 살았다.


나 조세핀 호퍼는 에드워드를 증오했지만 동정했고 미워했지만 사랑했다.

그의 죽음으로 에드워드와 나의 ‘우리'라는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이 그림들은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 위 글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작품과 그의 부인 조세핀 니비슨(Josephine Nivison) 의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1882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기는 하였지만, 그의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의 작품들은 주목받지 못했고,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러스트 작가로 지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그의 나이 42살에 조세핀 니비슨(Josephine Nivison)과 결혼합니다. 조세핀은 에드워드보다 한 살 어린, 같은 학교 출신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에드워드는 조세핀과 연애를 하던 시절, 조세핀의 추천으로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에 그의 작품을 올리게 되고 이때 화가로서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는 그의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를 맞이합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매우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었습니다. 그림이라는 매개체로 조세핀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세핀이 화가로 활동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고, 당시 여자들의 일인 요리와 집안일에 조세핀 또한 몰두하길 바랐습니다.  


    조세핀은 150cm 남짓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2m의 거구인 에드워드를 꼬집고 할퀴기까지 하며 그의 강압적인 요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대립은 잦았으나 에드워드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결혼생활을 끝내진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그림의 모델로 조세핀을 고집했고, 그 결과 에드워드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금발 여인은 조세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외향적이고 활달한 조세핀은 내향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에드워드를 대신해 그의 그림 작업은 물론 미술관, 갤러리의 전시 업무까지 조율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1967년 5월 15일 자신이 거주하는 뉴욕 맨해튼 워싱턴 스퀘어 근처 작업 스튜디오에서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후 조세핀은 3천 점이 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휘트니 뮤지엄, 뉴욕현대미술관, 디모인아트센터, 시카고 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에드워드가 죽은 지 10개월 후 조세핀도 생을 마감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와 그의 부인 니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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