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A Conte #13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때로 어떤 이미지는 너무 강렬해서
지치지 않고 주인을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혹은 무시무시한 악령처럼 하루를, 몇 주를, 드물게는 인생 전체를 지배한다.
얼마 전 본 초코쿠키 이미지가 그랬다.
초코쿠키 같은 것은-물론 쿠키에 악령같은 힘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떨쳐내기는 꽤나 어렵다. 특히 통통하고 촉촉한 쿠키가 우유에 반쯤 들어간 광고를 봤을 때는 더더욱. 머리를 짜릿하게 할 만큼 많은 양의 설탕이 들었을 그 쿠키는 촉촉하게 우유를 머금은 식감과 진득한 점성을 무기로 떼어지지 않는 강력한 발판 처럼 나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쿠키를 사고도, 다른 볼 일은 제쳐둔 채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기다린 만큼 급하게 해치우고 싶지는 않아 다른 식료품을 정리한 후에 식탁에 앉았다. 유리컵에 우유를 가득 따르고 쿠키를 충분히 적셔 한입! 입 속에 퍼지는 충만한 달콤함과 함께 마법처럼 쿠키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결혼 첫날 아침에 본 광경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충만한 기쁨에 젖어 조제트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폭신한 슬리퍼를 신고 커피를 내리러 부엌으로 갔다. 부엌 창밖으로는 중절모를 쓴 신사가 지나가는데, 그의 머리 위로 화창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창을 그대로 통과한 햇살에 빛나는 사과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 생각은 가끔 괴상한 방향으로 움직여서, 사과에 작고 귀여운 벌레가 들락 거리는 상상이 더해졌다. 또한 나는 커피를 마시며 신사의 중절모를 사과 위에 얹어 보기도 했다. 햇살과 초록 사과와 푸른 하늘, 중절모의 신사, 내게 사진기가 있다면 꼭 기록해놓고 싶은 순간이었다.
사람의 얼굴에서는 단연코 눈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면도를 하기 위해 거울을 볼 때 나는 가끔 눈과 입만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눈은 한 없이 커지면서 나를 제 3자로 바라보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눈동자의 심연에는 바다도, 하늘도 있어 나는 마치 화장실 앞 거울을 떠나 넓은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아주 조용할 때, 내가 혼자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지금 내가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땅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열두살, 아직 솜털이 풋풋했던 조제트와의 첫만남도 눈동자만이 생각난다. 푸른 색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중년이 지나 아침을 함께 맞는 지금도 같은 빛을 하고 있어 여전히 열두살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기억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르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나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2주 후에나 발견되었다는 어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모습은 흉측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강가에서 건진 어머니의 얼굴에는 흰 천이 감싸 있었다. 흰 천은 마지막의 끔찍함을 감추는 동시에 그 아래 숨겨진 얼굴을 상상하게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는 늘 죽음을 향해 질주 하는 사람 같았기에 나는 죽음 자체에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젖은 얼굴을 감싼 흰 천만은 슬픈 건지, 끔찍한 건지, 외로운 건지, 무서운 건지 잘 모르겠는, 어색한 느낌으로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아있다. 때때로 이 이미지는 나를 괴롭힌다. 꿈 속에서 입모양 맞추기 놀이를 하는데 상대방의 얼굴에 갑자기 흰 천이 드리워 그를 볼 수 없어 애를 먹는다던지, 한가롭게 해변에서 아몬드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얼굴에 그 천이 드리우는 바람에 먹을 수 없다던지 하는 사소하고 불편한 꿈으로 말이다.. 나는 이 이미지를 주제로 가끔 작업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그 기억이 남긴 흔적이 옅어지는 기분이다.
30년 전 쯤 되었을까, 유난히 더위가 제 몫을 못하던 시원한 여름, 휴가지에서 봤던 여자 아이들의 소꿉놀이도 기억난다. 열심히 가짜 찻잔과 가짜 접시에 차와 디저트를 덜어 먹는 시늉을 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던 아이들. 해가 저물 무렵 저녁을 먹으라는 소리에 아이들이 뛰어 들어가고 나는 남은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장난감 찻잔 세트를 봤다. 군데 군데 이가 나간데다 색도 바래고 더러워진, 조악하게 만들어진 장난감 도자기는 흉측한 동시에 정겨웠다. 어설프게 두른 금테와 울퉁불퉁한 손잡이의 질감이 흥미로워 나는 한참 그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 지저분하고 어설픈 찻잔에 차를 마실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차를 마실 수 없다고 해도 나는 그걸 찻잔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인상, 이미지들은 때로 나를 괴롭히지만 대부분 나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체스 놀이를 할 때도 언젠가 본 중절모의 신사를 킹과 바꾸고는 그를 마음대로 옮기고, 때로는 사지로 내모는 은밀한 즐거움을 누렸다. 강렬한 이미지들은 서로 섞이며 현실을 넘어선 나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나는 소인국의 왕이 된 듯 거만한 기분으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오브제들을 재배치하며 한껏 그 기쁨에 취했다.
말들은 하늘을 날아다녔고 비둘기는 불쾌한 깃털을 벗고 투명하고 영롱한 존재로 광활한 우주를 날았다. 내 상상 속, 터무니없이 자유 분방한 나라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었다. 아니, 나는 누구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을 위한 그림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어제는 대단히 독특한 경험을 했다. 다소 협소하지만 맛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 땅에 흐르는 남성 호르몬은 모두 가져온 듯 굉장히 강력한 인상을 주는 남자가 들어왔다.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다부진 체격에 씩씩 거리는 숨소리, 검게 탄 얼굴까지.. 재미있는 건 그가 들어오자마자 방 안에 굉장한 장미향이 퍼졌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식사를 방해할 정도로 과도하게 향기로운 냄새였다. 절대로 남성적인 향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강렬함은 향수가 닿는 거리에도 영향을 끼치는지 나는 마치 식당 안이 장미로 꽉 차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 때부터는 그의 얼굴 위로 눈코입 대신 장미가 보였다.
장미와 작은 방, 그리고 다부진 남자
나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즐겁다. 모든 아름다움은 너무 뻔할 때 그 힘을 잃는다. 거친 남자가 장미향을 풍길 때, 끝없는 바다가 콘크리트 벽에 갇힐 때,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엉뚱한 다른 것이 있을 때.. 나의 상상은 끊임없이 현실의 저편으로 나를 데려간다. 오직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이미지의 날개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 위 글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과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Conte 는 쿠도스 아틀리에에서 발행하는 단편입니다
⋇ And More…
- 르네 마그리트는 글에 소개된 것 처럼 하나의 사물을 맥락과 관계 없는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 본래의 성질을 지우고 새로운 관계성에서 탄생하는 기이함을 연출해 강한 충격을 주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즐겨 활용했습니다
- 르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실제로 그가 14살 때 물에 뛰어들어 2주 후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때 어머니의 얼굴에 덮혀 있던 흰 천은 평생 그를 쫓아다닌 기억 입니다. 그는 이 이미지를 다양한 작품에서 모티브 삼습니다
- 하지만 르네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이는 어머니의 부재를 채우려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12살이 되던 해에 조제트 베르제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합니다(하지만 중간에 바람을 피고 이를 숨기기 위해 친구를 통해 조제트를 유혹하려다 이를 들켜 약 4년을 별거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