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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아모르 Feb 27. 2024

심천에 도착하다

2017년 여름 같았던 봄, 중국에 법인을 만들다

2014년에 처음으로 중남미 온두라스로 떠났다. 졸업에 대한 두려움을 봉사활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달래며 떠났던 그 길은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그러다 미국에서 사장님을 만나서 2015년부터 미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비자에 문제가 생겨 어쩔 수 없이 미국에서 신분이 불안한 상황이 되었고, 그때 회사에서는 중국지사를 설립하려 하는데 가보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일단 신분으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워낙 많이 봐서 그런지 불안한 상태로 미국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학창 시절 2번 가본 중국경험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서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나는 20대 중반을 막 지난 나이로 제대로 된 업무 지식이 없었다. 그저 미국에서 담당했던 물류 관련 업무 (로지스틱 코디네이터란 멋진 타이틀이 있었다) 정도였다. 그렇게 2016년 중국 법인을 준비하고자 한국으로 떠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 당시 중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보니 가장 어려운 길을 통해 중국 법인을 설립했다. 법인 설립을 대행해 주는 한국 에이전시를 사용했는데 비용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그분은 개인사업자로 그분 또한 다른 한국인 에이전시를 껴서 일을 진행하다 보니 결국 비용이 이중으로 들었던 것 같다. 커뮤니케이션도 하나를 거쳐서 하다 보니 커뮤니케이션 비용도 높았다. 


중국은 내자법인과 외자법인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고 내자법인에 비해 외자법인은 훨씬 까다로운 관리를 받았다. 합작법인의 형태도 있지만 중국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선택지였다. 


특히 은행 설립도 언어 장벽으로 인해 한국 은행인 우리은행을 통해 계좌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은 기본계좌 개념이 있어서 기본계좌로만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 많았다. 그리고 제일 황당했던 것은 외화를 입출금 하려면 무조건 은행에 방문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무실과 은행은 적어도 1시간 거리였고 매달 1-2회는 미국에서 운영비를 송금받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무거운 중국 도장 (공장, 재무장,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을 들고 우리은행까지 가야 했다.


중국에서 사업하시는 많은 분들은 중국인 파트너를 찾아 내자법인을 세우고 홍콩에 법인을 설립하여 기본적인 운영비만 중국으로 보내고 대부분의 송금업무는 홍콩을 통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홍콩시위 등으로 인해 중국이 홍콩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면서 홍콩 페이퍼컴퍼니들이 자금세탁 등의 이유로 송금이 막히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에서는 외화 송금이 어렵기 때문에 홍콩 계좌를 사용하는 공장이 많다. 


처음으로 한 일은 숙소 겸 사무실을 찾는 일이었다. 그때도 에이전시를 통해서 진행했다. 법인 설립을 위해서는 주소가 필요하다고 하여 한국에서 부랴부랴 들어와서 며칠 만에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결국 괜찮아 보이는 집을 계약했다. 2층짜리 아파트였는데 넓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내 숙소는 2층에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을 선택했다. 임대료는 정확하진 않지만 12000위안 정도였다. 그 당시 한국 돈으로 2백만 원 정도였고 2017년임을 감안하면 심천의 임대료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자 한다면 절대 비추천하는 것이 숙소와 사무실을 같이 쓰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회사에 그렇게 제안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속 집에만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출퇴근 길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고 처음 해외에 나가면 무조건 동선을 넓게 가져가는 것이 적응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첫 사무실이자 숙소였던 남산역 앞 아파트


사무실 계약만 하고 법인 설립이 완료될 때까지 몇 달을 기다리다 결국 중국에 입국하였다. 핸드폰 개통도 한인 부동산 사장님의 도움으로 겨우 할 수 있었다. 처음 중국에 갈 때만 해도 적어도 영어로 기본적인 소통 정도는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중국은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로컬에서 식당에 가고, 마트에 가고 하는 일에서 영어를 기대하면 안 된다. 한국도 그럴 텐데 왜 중국은 다를 거라 생각했었을까. 아무튼 나는 중국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에서 한국 에이전시, 한국 부동산 사장님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개통된 핸드폰 하나와 함께 숙소에 들어와 중국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하필 청명절 휴일이었다. 약 3일간의 연휴였는데,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특히 처음 숙소에 들어온 뒤에 문 뒤에 붙은 빨간 중국 글씨들 (복을 부른다고 믿는 그 빨간 글씨들) 떼려고 나갔다가 문이 닫혔는데 그때 알게 되었다. 중국 문은 닫히면 밖에서 열 수 없다. 잠근 것도 아닌데 그냥 닫히면 밖에서는 열 수 없다. 얼마나 황당한가? 중국 오자마자 겨우 문을 따고 들어왔는데 나는 문 밖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핸드폰은 집 안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후회가 몰려왔다. 행복했던 미국 생활이 그리웠다. 다행히도 1층에 내려가서 경비로 보이는 분에게 손짓 발짓을 하면서 문을 못 여는 마임을 펼쳤다. 정말 1-2분은 연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 그분이 이해를 하고 열쇠 여는 사람을 불러주었다. 그것이 중국에서 첫날이었다.


연휴를 마치고 원래 합류하기로 했던 홍콩 출신 엔지니어가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드디어 말을 할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사무실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구매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는 중국생활 시작이다.

사무실이자 숙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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