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
"그는 지난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우연들이 겹쳤다. 며칠 전부터 기억과 관련된 강의를 들었고, 오늘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아침 겸 점심을 차리며 먹을 때 뭐라도 봐야겠다 싶었다. 티빙에 들어가 <플라이미 투 더 문>을 눌렀다. 추가 결제를 해야 볼 수 있었고,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넘어갔다. 순간 며칠 전 들었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언급되었던 <화양연화>가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리마스터링 된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화양연화>가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화인지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떠올랐다. 강렬한 색감이라던지, 삽입곡들의 느낌이 나는 비슷하게 느껴졌다. 여자 주인공이, 모두 중국 배우였던 것도 내가 그런 인상을 갖는데 영향을 주었을까. 두 작품 다 불륜관계를 다루고 있고,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내게는 큰 여운이 남았다.
장만옥이 궁금해졌고, 양조위가 궁금해졌다. 각 장면들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감독이 어떤 의도를 담았는지 궁금해졌다. 영화평론가, 유튜버, 블로거들의 해석을 찾아서 읽었다. 영화가 개봉한 2000년은 중국이 홍콩을 영국에게 반환받은 지 3~4년이 되던 해이다. 홍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감독은 그런 불안한 감정을 영화 <화양연화>에 담았다는 해석이었다. 196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홍콩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감독의 감정을 투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감독이 영화에서 애용한 영화적 장치, 이중 프레임을 중심으로 해석을 한 영상을 보았다. 이중 프레임은 문이나 창, 기둥이나 건물을 이용해 프레임 안에 또 다른 프레임을 만드는 기법을 의미한다.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이 이중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튜버는 그 이유가 영화 자체가 남자 주인공 (차우)의 기억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매번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장면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순간은 길게, 어떤 순간은 짧게 보여준다. 중요하지 않았던 순간들은 끊기고, 너무 좋았던 순간은 슬로모션으로 처리된다.
나는 박문호 박사를 좋아한다. 그는 학문 전반을 통합적으로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박문호 박사가 "기억"에 대해 강의하는 영상을 다시 한번 보았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저장된 과거의 기억을 현재 상태에 맞게 꺼내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그는 기억에 대한 기존의 담론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존에 우리는 기억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사진첩에서 사진을 끄집어내듯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낸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최신 이론을 살펴보면 기억은 사진을 통째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을 파편화해서 저장한 뒤, 내가 그 기억을 필요로 할 때 현재의 감정 상태에 맞게 파편화된 사진 중 일부를 끄집어내어 재구성한 것이다. 마치 콜라주처럼.
그는 기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탈맥락적 기억과 맥락적 기억. 탈맥락적 기억은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상상이나 꿈같은 것이다. 탈맥락적 기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랜덤 하고, 확률에 근거해서 일어난다. 반면에 맥락적 기억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앞의 기억과 이어지는 기억이 인과에 따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즉, 그럴듯하며 일어날만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기억, 맥락적 기억이다.
맥락적 기억은 저장용량이 무한대이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공간과 시간에 따라 쓰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A4용지 10장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맥락적 기억에서 탈맥락적 기억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적 기억에서 맥락을 제거하면 탈맥락적 기억이 된다. 맥락이라 함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즉 맥락기억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면 탈맥락적 기억(의미기억)이 남게 된다. 탈맥락적 기억은 맥락을 제거한 뒤에도 남는 것들, 그만큼 중요한 것들만을 채로 거르듯 거른다. 즉, 중요한 속성만 남게 되고 그 속성을 일반화가 가능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반화가 된 기억은 하나의 패턴, 즉 탈맥락적 기억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탈맥락적 기억은 세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 기억은 동적 현상이다. 기억을 하는 순간마다 파편화된 조각들이 계속해서 재조합된다. 둘째, 확률적 사건이다. 셋째, 비선형적인 현상이다.
<화양연화>는 남자 주인공(차우)의 탈맥락적 기억 그 자체다. 첫째, 영화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남자주인공이 재구성한 기억들이다. 때문에 여자 주인공(첸)은 항상 화려하고도 완벽한 치파오 차림이며, 남자 주인공(차우) 본인은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에 멋들어진 정장차림이다. 둘째,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순간 중에 불특정 한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는다. 확률적 사건인 것이다. 셋째, 그의 기억은 비선형적이다. 시간의 순서가 모호한 장면들이 중간중간 끼어있다.
박문호 박사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뇌가 "사실"을 잘 기억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억은 일관성(그럴듯함)과 사실성이 충돌했을 때, 일관성의 손을 들어준다. 원시 인류가 숲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수풀이 바스락 거린다면, 그 순간 그들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숨어있는 것이 맹수 인지, 토끼인지. 바스락 거린 수풀의 크기, 위치, 주변의 냄새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사자가 숨어있었음직하다면, 또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면 도망갔어야 한다. 아마도 그런 원시 인류의 생존율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럴듯함"에서 그리고 파편화된 사진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왜곡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왜곡이 있어야만 성립가능한 것이 바로 화양연화가 아닐까.
2025.02.05 365개의 글 중 18번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