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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Jun 30. 2024

처음이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시발점이 처음인 건 확실한데, 도착점에 이른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차를 돌려세우면 처음이다. 역류의 처음이다. 출생은 개인사의 처음이다. 여든의 연륜을 쌓으면서 무수하게 처음을 경험했고, 그 축적에서 나이에 숱한 점을 찍어 왔다. 불확실하지만 언제까지는 나이를 먹을 것이다. 얼마 후, 다시 겪게 될 처음들….



생애 속에서 시간의 화살에 점을 남긴 모든 처음은 시간을 축낸 만큼 소중하다. 나이 들면 어른인가. 시간에 관해, 전에 학습한 바 없는 첫 터득에 번쩍 깨어난다. 이런 싱싱한 날것의 신선함이라니, 처음이다. 외부의 영향이 없을 때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게 관성이다. 일부러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 정지한 물체는 계속 그대로이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그 방향으로 진행한다. 하루를 그렇게 도미노로 쌓는 관성은 습관이 되고, 그대로 몸에 밴다.



습관은 좀체 흔들림이나 균열이 없다. 이제까지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굳건한 경향이 습관이다. 어쩌다 공격적 자극을 받으면 앞으로의 궤적을 조금 보정하면 그만이다. 습관은 좀체 파괴되지 않는다. 깁고 꿰매며 수선할 뿐.



식탐은 습관으로 비만케 한다. 해 온 대로 하려는 것과 하지 않던 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의 명백한 이분법. 내 경우, 그것은 대부분 생래적이 아닌, 후천적 결과물로 쌓였다. 고치고 덧대려 해도 습관이라 여지를 안 주는 고질이다. 습관이 더께로 배면 행동반경이 제한적이 돼 외부에 대해 자칫 경직되게 반응한다. 유연성이 없다. 흠집을 바로잡으려 해도 가탈 부린다. 흐지부지 그건 실없는 처음이다.



습관으로 책상에 앉는다.



글을 쓰면서 나는 늘 처음에 있다. 길든 짧든, 시든 수필이든, 칼럼이든 쓰고 있다. 못 배기니 쓴다. 소재의 빈곤에 허덕대다가도 가느다란 물꼬를 터 몇 줄 쓰게 되는 게 글이다. 진즉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몇 번 날갯짓하지 못한 채 시간의 등에 업혀 오늘에 이른다. 걸음이 굼뜬데도 제멋에 이러니 모를 일이다. 손 놓고 앉으면 목마르다. 하릴없는 처음이다.



자평하거니, 내 문학은 버둥대지만 아직도 태작(駄作)의 경계를 넘지 못해 부글부글 애끊는다.



재능은 한계이고 장벽이다. 간혹 역작이라 무릎 치며 우줄대다 1930년대의 글만 못하니, 쓰던 걸 저만치 밀어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공을 쌓는다며 매진하고, 등단 때 가슴 팔딱이던 처음을 잃지 않으려 엄혹히 닦달하나 노상 맴돌고만 있다.



운동해야 성장하는데, 늙지 않으려면 운동해야 하는데, 이건 그냥 정지 상태인가, 속절없는 관성인가.



부질없다 투덜대며 써 온 관성, 그래도 적잖은 작품을 써냈다. 몇 권의 책도 상재했다. 책은 씨와 날로 엮어 내 생의 희로애락을 뜰채로 떠 하나의 의미망에 포획한 값진 성과물이다. 나는 지금 그런 대로 주체하지 못할 열락에 잠겨 있다. 이제 된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잠을 깨는 순간, 책상머리에 놓인 전자시계에 눈이 갔다. 남아 있는 내 삶의 처음이다. 처음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시간 위에 빛난다.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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