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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Nov 02. 2024

명함에 적힌 건 정말 내 '이름'일까?

갑을관계에서 벗어나 내 이름을 세우는 일

바이어라는 직군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회사와 산업 구조가 안겨주는 '갑'의 위치성 때문이다. 특히 다니는 직장이 보유한 유통망이 거대할수록 바이어의 어깨는 한없이 승천한다. 내 커리어의 시작은 유통회사 바이어였다. 몸담고 있던 곳은 1년에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기업이었고, 자연스레 몇 명 되지 않는 본사 바이어 한 사람 한 사람의 파워는 꽤 강했다.


비록 사원 나부랭이였지만 내가 전산망에 숫자를 100을 넣느냐, 200을 넣으냐에 따라 협력업체 담당자의 실적이 오르내린다. 자연스레 '바이어님,'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청탁 전화와 메일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분위기도 바뀌고 법도 강화되어서 흔히 말하는 '접대'는 없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공공연하게 있었던 일이라며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동료 중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중소기업 대표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똑바로 일하라며 일갈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급가를 낮추라고 요구하거나, 이번에 행사를 잡아야 할 것 같다고 지원금을 타내기도 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꽤 애를 먹었다. 그게 그 회사를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분명한 갑임에도 불편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정말 갑이었을까? 조직의 수직체계에서는 한없이 '을'에 불과했으니 꼭 그렇지도 않다. 내가 본사에 다니고 있다면, 난 갑인가? 자사 물류센터 담당자와, 각 매장 담당자와, 콜센터 담당자에 비하면 갑인가? 꼭 그렇지도 않다. 그저 같이 일하며 깨지는 월급쟁이에 불과한 것을.


눈을 위로 돌려보았다. 쭉 올라가서 회사 대표는 갑인가? 많은 경우에는 그렇다. 하지만 국정감사에 끌려가 면전에서 "000 대표는 구속시켜야 해요!"라는 국회의원의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대표의 심정은 어땠을까? 주주한테도 고개를 숙이고, 미국 본사 회장에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면 어땠을까? 미국 본사 회장은 미국 의회에서 한 소리를 들었을 테고.


'사짜'로 대변되는 전문직을 희망하는 건, 계급의 사다리를 손수 올라타는 이러한 수고로움을 건너뛰고 처음부터 갑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직은 필연적으로 갑질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써먹어주는 클라이언트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말이다. 요즘 가장 인기가 많은 의사도 마찬가지다. 페이 닥터라면 원장에게, 개업을 했더라도 손님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갑에게는 또 다른 갑이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높아 보여도 하늘의 입장에서는 가장 낮은 지점에 불과하듯이. 둘째, 갑과 을의 위치는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난 현재 아무리 높게 쳐줘도 을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카르마(Karma)는 다분히 영적인 개념이지만,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실존적 경험이니까. 대기업에서 소위 하청업체를 쥐어짜던 사람도 퇴직하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려지기 마련이다. 이 나라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자는 어찌 되었는가. 그들의 말로, 아니 권력을 손에서 놓치자마자 벌어졌던 일은 또 어땠는가. 잔인했던 자들은 더 잔인하게 내쳐졌다.


갑을 관계는 영속적이지 않다. 그러니 피라미드의 표면을 타고 올라가는 일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자. 그 대신 계급장을 떼고도 명명될 단 하나의 이름을 세우는 일에 정성을 쏟자. '조직이 없으면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난감한 질문을 한 번쯤은 받아보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본명을 말하는 것 외에는 대답할 도리가 없는, 답이 있긴 한 건지 헷갈리는.


작가가 좋은 건 계급과 상관없이 정의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을 쓰는 일에는 위아래도, 보고서도, 결제도 필요 없으니까. 물론 모든 작가가 같은 건 아니다. 작가로서의 영예나, 혹은 인세 같은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얼마든 나눌 수 있다. 다만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하는 한 쉬이 수직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무엇보다 조직이 없더라도 난 얼마든 책 두 권을 출간한 작가라고 떠들 수 있다.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글 쓰는 작가'라는 조그마한 타이틀이나마 얻어낸 것이다. 이 타이틀을 얻기까지 적어도 십수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난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장에 내 생각을 끄적이곤 했으니까. 만약 누군가 감사하게도 내 글이 좋다고 말해준다면, 그건 지금 이 순간의 '나'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간 동안 묵묵하게 글을 써온 수많은 '나'에게도 공을 돌려야 마땅하다.


이름을 세우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생각보다 길게. 뭐든지 빠르게 성취해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각광받는 시대이지만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소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장면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노출될 수 있는 기술적 기반 위에서 살아가다 보니 성공이 만연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 급하게 얻은 무언가에 과연 얼마의 숙고와 지속성이 담길 수 있을지도 의문일 테고.


그러니 간신히 쌓아 올린 이 이름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고 싶다.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어디에서건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p.s. 써놓고 나니 송길영 작가의 책 <호명사회>의 제목과 비슷한 결론을 맺는다.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결국 이름을 부른다는 콘셉트가 유독 와닿았나 보다. 사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그렇고, <너의 이름은>도 그렇고 이름을 부른다는 건 예술에서도 중요한 모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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