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민음사에서 출간된 인문잡지 ‘한편’의 1호 ‘세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 속 개인에게 세대경험은 공동 실존의 경험이며, 크든 작든 우리 세대라는 공동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 세대가 경험한 ‘공동 실존’의 형태를 상상할 수 있다. 혹자는 현대 한국 사회가 ‘억울함’이라는 정서로 가득차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억울함’은 분배 불평등 문제의 산출물이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라는 문제는 정치학에서 아주 오랜 시간 논의되어온 문제이며, 정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분배’는 곧 ‘권력’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 실존 경험’은 곧 권력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구조와 개인의 관점에서, <구조로서의 권력>은 개인에게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선사하며, 개인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내재화된 사회구조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Power은 무기력Powerless을 만든다. 권력과 무기력의 역설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해미를 찾을 수 있다. 해미는 우리와 같은 ‘공동 실존’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이며, 영화 속 해미의 대사에서 그 실존 경험의 증거가 드러난다. 종수와의 첫 만남에서 해미는 성형 사실을 밝히고, “나는 이런 몸 쓰는 일이 좋아”라며 자신의 직업을 옹호한다. 그는 빚을 내어 아름다워진 몸을 스스로 대상화하며 ‘바디 디스포리아Body dysphoria’ (내지는 ‘페이스 디스포리아’)를 해소한다. 우리 세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디스포리아’ 문제는 여성의 외모를 향한 남성권력의 횡포에 기인한다. 영화 속 종수는 벤이 가진 부와 대비되는 가난한 청년의 역할과 함께 여성을 향해 ‘너 정말 못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남성권력의 역할을 수행한다. 해미가 본인의 몸을 대상화, 상품화하는 행위와 그가 벤이 가진 부에 편승하는 ‘듯’ 보이는 영화 속의 시선(종수의 시선)은 남성권력, 남성에 의해 구조화된 <구조로서의 권력>이 일반여성의 몸을 억압하고, 가난한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을 명백하게 제시한다.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권력>은 해미에게 무기력을 선사하고, 이는 영화 속에서 아프리카의 노을을 보며 ‘나도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해미의 눈물로 나타난다.
우리 세대 여성들의 ‘공동 실존 경험’은 <구조로서의 권력>에서 디스포리아와 무기력으로 그리고 다시 권력문제로 이어지는 절망같은 사이클이다. 해미는 귤을 까는 판토마임을 선보이며,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이는 주체성과 실존을 잃은 그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영화 전반에서 해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여성 공동체의 ‘실존’ 경험이면서 동시에 ‘주체성의 실종’이기도 하다. 그의 몸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소유가 불분명한 몸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대상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대상화에 대한 인지가 여성의 실존을 고백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버닝>이 1차원적이고 표면적인 여성혐오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영화의 주제의식과 여성 캐릭터 자체를 지나치게 평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남성권력 속 여성의 사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종수와 벤으로 표방되는 남성 권력의 모습을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공동 실존 경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불쾌감을 느끼고, 남성권력이 유도하는 여성의 모습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주체성을 회복하고 여성으로서의 공동세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페미니즘적 공동 실존 경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