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임에 들어가 "저는 책을 좋아합니다." 라고 선언하면 일순간 많은 시선을 받게 된다. 내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면서 "얼굴이랑 안 어울려서 그러죠?" 반문하면 무리는 배를 뒤집으며 웃는다. 그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모르지만 내 얼굴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어린 소현이를 생각하자면 안면의 온 근육이 잉어 새끼처럼 웃는 사람들을 볼 때보다 더 격렬하게 요동친다. 양껏 웃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서 그럴 수도 있고, 인상을 쓰다가도 도서관에 배를 깔고 누워 있던 나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그럴 수도 있고. 5교시가 끝나면 주산암산 방과후 수업을 받다가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앞에 있는 신발장에 운동화를 욱여 넣고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면서 들어가면 느껴지는 고향의 향기가 좋았다. 문과 마주한 책상의 셋째줄이 내 자리였다. 아홉살, 열살, 열한살, 열두살, 열세살의 소현이가 어떤 책을 읽으며 기뻐했고 슬퍼했는지 기억이 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꺼운 책장을 채운 두꺼운 책을 보며 느낀 풍부한 만족감, 그보다 더 큰 경외감이 여느날의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혼자 걷는 하굣길이 싫어서, 비어있는 집을 보는 게 싫어서, 사서 선생님이 집에 갈 때까지 노을을 등지고 앉아있던 몇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한다. 삶이란 긴 마라톤이라는 말이 싫어 눈물 짓다가도 열두살의 내가 터벅터벅 걸으며 감탄했던 나무를 생각하면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믿고 싶어진다. 하굣길의 노을이 빨갛게 내려 앉을 때, 그와 같이 빨개지는 어떤 책의 몇 페이지, 나의 어깨죽지와 잘 뻗치는 빨간 머리를 상상할 때, 나는 책이란 내 삶을 구성하는 기계부품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어떤 설계도를 가지고 어떤 알고리즘에 따라 사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활자와 그 사이 공간이 나의 지난 삶을 운동시켰음을 안다. 늦은 밤 티비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날들처럼, 집나간 아빠를 끌어안던 겨울처럼, 출근준비를 하는 엄마를 몰래 훔쳐보던 거울처럼 외롭다는 글을 쓰면서도 머리맡에 책과 연필을 두고 있는 나를 사랑하자. 나는 수없이 다짐하고, 책을 덮었다 펴고, 연필을 쥐었다 놓는다. 애매하게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게 지옥인 줄 모르고 사랑했던 열 몇살의 내가 나를 울린다. 그 때 읽은 책이 나의 유일한 동력이다. 누군가는 책을 읽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게 독서란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므로, 일그러진 근육을 웃는 데에 쓰면서도 잡고 있는 책이 다른 무엇보다 나를 살아가게 하므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책을 읽지않는 나를 상상하기 힘들어해야 한다. 이 글은 파도처럼 울렁이며 살 어느날의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러브레터. 힘을 내서 읽고 쓰자. 그게 내가 사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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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20살 1월에 썼으니 꼬박 2년을 묵은 셈이다.
타지에서의 2년은 내게 삶과 사랑을 알려줬고 그는 지옥 같기도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고 사랑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수정해야 할 문장이 수도 없이 보이지만 그대로 두었다.
겨울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