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지혜가 빛나는 겨울


1. 죽음과 겨울


    올해 유난히 눈이 많이 오는 것 같다. 매섭게 춥기도 해서 잘 녹지도 않는다. 서양에서는 이런 눈쌓인 풍경이 스산하고 섬뜩한 죽음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눈 속에서 고립돼 쓸쓸히 죽어가는 영화 속 장면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계절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에도 뜨거운 손발을 가져서인지, 아니면 그 고요한 풍경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다. 동물들도 겨울을 나느라 숨죽인 숲속에서 눈 밟는 소리만 울리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다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낭만 있는 겨울을 보낼수 있는 건 따뜻한 난방과 옷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환경과 다르게 살았던 고대 사람들에게 겨울은 정말이지 큰 고난이자 고비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서도 겨울을 죽음의 계절이라 생각했을까? 마지막 겨울 절기를 살펴보며 고대 사람들이 어떻게 겨울을 보냈는지 알아보자.  






2. 겨울, 무지개가 사라지는 계절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는 매마른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다면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도저히 껴입지 않고서는 못 버틸 추위가 찾아오면?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추위보다도 입동立冬이 지나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으로 가장 먼저 겨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한다.


물이 처음 얼고 땅이 처음 얼기시작한다. 꿩이 회수에 들어가서 조개가 되고, 무지개가 감춰져 절기가 정해진다. (여씨춘추, 맹동기) 是月也,以立冬水始冰,地始凍. 雉入大水為蜃. 虹藏不見.


    기온이 낮아지면서 땅이 얼고 꿩이 조개같이 웅크려 겨울잠을 시작한다. 그런데 왜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일까? 오늘날이라면 공기 중 습기가 낮아지면서 겨울에 무지개가 보이지 않는 것 쯤은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사람들은 무지개를 양쪽에 머리가 달린 용으로 여겼다. 그러니 무지개가 뜨는건 굉장히 상서로운 일이었는데 고대 사람들은 세상의 음기와 양기가 서로 교차할 때 무지개가 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에 점점 음기가 왕성해지면서 땅 위에는 음의 기운으로 가득차게 되고 양의 기운은 땅 속으로 숨게 되어 교차되던 음양의 기운이 차단돼 더이상 용이 나타나지 않게 되면서 무지개가 감춰진다고 해석했다. 무지개를 통해 점점 음양의 순환이 단절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무지개 홍紅의 갑골문. 양쪽에 달린 것이 용의 머리다.


    이렇게 무지개가 사라지면 그 이후부터는 지난한 겨울의 시작이었다. 겨울은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아주 혹독한 시기였기 때문에 지난날 수확한 식량들을 소비하며 버텨야 하는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겨울이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입동 이후의 겨울 절기를 살펴보면 다가오는 추위에 대한 절기들이 대부분이다. 동지 이후의 겨울절기에는 눈이 내리는 소설小雪과 대설大雪, 그리고 가장 긴 밤이 되는 동지 冬至,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는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이 있다.  






3. 추워야 깨달을 수 있는 것


    우리가 여름 글에서 알게 된 양의 기운은 상승하고 뻗어나가고 태양의 열기가 피어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름의 정반대인 겨울은 어떤 모습인가? 겨울은 춥고, 비가 얼어 눈이 오고, 그리고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 또 흘러가지 않은 눈 때문에 질척이고 동식물이 꼼짝 않고 죽어버리는, 그런 계절이다. 고대 사람들은 이런 특징이 음의 기운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겨울을 따뜻하게, 혹은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양의 기운을 깨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이렇게 뒤바뀐 음양의 기운을 애써 바꾸거나 일부러 양의 기운이 잠들어 있는 땅을 뒤섞어 깨우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양기와 음기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 그렇게 했던 것일까? 조금 단순하게 얘기해보자면 그건 '겨울이 그러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음의 기운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피폐하고 음습한 이미지를 떠올려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기지만 겨울의 죽음은 영영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휴식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생명을 길러오던 힘이 철저히 단절되어 죽은 듯 쉬어야 다시 성장이 필요한 순간에 움직일 수 있었다. 겨울은 마땅히 양의 기운과 차단돼 음기의 영향을 펼칠 수 있게 두어야 했다. 이건 여러 요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겨울이 추워야 해충들이 죽어 이듬해 농사를 시작하기 좋은 환경이 되고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속담처럼 눈이 많이 와야 봄에 먹을 수 있는 보리가 잘 자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寒은 집 안에서 풀을 깔아놓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물론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가. 때문에 겨울은 인내심의 계절이기도 했다. 이 인내심은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혼란에 빠지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인내심이기도 하다. 이 어려움이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 그 고난의 결을 잘 살필 수 있는 지혜로부터 이 확신을 가지게 되고, 이 지혜가 인내심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부터 이런 지혜를 갖출 수 있도록 마음을 지키는 충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의지나 태도가 강조되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평민들보다는 평민을 다스려야 하는 높은 신분에게 엄격히 요구되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인간의 본성이 잘 드러나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만큼 인내심을 강조했던 것은 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4. 어려울수록 올바름을 지켜라


    주역에서는 겨울에 강조되는 태도를 보여주는 괘가 있다. 지화명이(地火明夷, ䷣)괘는 밝음明이 손상당하다夷라는 의미로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 ☷) 밑에 불을 상징하는 이괘(離, ☲)가 합쳐진 괘다. 형상으로 보면 땅 아래로 불빛이 덮혀진 상태로 불의 밝은 빛이 손상당하다라고 해석되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괘는 겨울과 연관된 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땅 밑에 불이 있는 괘의 모습이 겨울에 땅 아래로 숨어버린 양의 기운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이 괘의 괘사 역시 겨울에 가져야할 태도와 비슷하게 이어진다.


명이괘는 어려움을 알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지화명이괘, 괘사) 明夷, 利艱貞


    명이괘의 괘사는 아주 짧고 간명하다. 어려움艱 속에서 올바름貞을 가지면 이롭다利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한줄은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올바름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방법을 겨울과 연관지어 고민해본다면 전과 후, 그리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72절후節候에는 24절기보다 더욱 세세하게 계절의 변화가 담겨있는데 72절후의 겨울을 살펴보면 소한과 대한 사이의 말후末候에는 겨울잠에 들었던 꿩이 운다거나(稚口) 겨울이 끝나가는 대한에는 겨우내 알을 낳지 않던 닭이 알을 낳는다(鷄乳)와 같이 생명이 움트는 순간을 발견한 내용이 담겨있다. 춥고 어려운 와중에도 주변의 변화를 세세하게 살폈던 것이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런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당황하거나 난감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좋지 않은 상황에 빠졌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 지혜를 갖기 위한 인내심은 침착함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고대 사람들은 음양이 단절된 겨울에도 겨울을 죽음으로써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겨울을 이해할수 있었던 것은 이 겨울을 잘 견디고 버티면 언젠가 지나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가능성을 발견한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혜가 서로 교차하는 이유는 멀리 내다보는 것과 가까이 보는 것의 차이때문이다. 오늘날이 옛날과 갖는 관계는 옛날이 그 후세와 갖는 관계와 같고, 오늘날이 후세와 갖는 관계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갖는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현재를 잘 살피고 알면 지나간 과거를 알 수 있고, 과거를 알면 앞으로 올 미래를 알 수 있으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과 뒤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위로 천 년 전의 과거를 알고, 아래로 천 년후의 미래를 아는 것이다. (여씨춘추, 중동기) 智所以相過,以其長見與短見也. 今之於古也,猶古之於後世也. 今之於後世,亦猶今之於古也. 故審知今則可知古,知古則可知後,古今前後一也. 故聖人上知千歲,下知千歲也.





5. 지금, 여기, 그리고 함께


    24절기와 함께한 계절글은 겨울로 마지막이다. 글을 쓰는 동안 어떤 판타지 세계에 다녀온 느낌이 든다. 계절의 흐름과 동떨어져 한겨울에도 딸기를 먹을 수 있고 여름에 언제라도 얼음을 씹을 수 있는 요즘과 너무나 다른 시대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감동과 감탄을 반복했다. 한편으로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왜 계속해서 고대의 계절에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고대사람들에게 사계절은 단순히 농업과 관련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부터 생명과 인생, 그리고 거대한 우주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관계되어 함께하는, 그 순환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득한 감각이야말로 오늘날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지혜를 조금이라도 엿볼수 있어 다행이었다.


서울에 위치한 홍릉숲의 겨울 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이슬이 맺히듯 끝을 맺는 시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