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는 사고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몇일 전 보았던 영상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미끼로 구멍 속의 사막 다람쥐를 바깥으로 유인해 봅니다. 우리는 다림쥐가 먹이를 먹으러 나올 것인지 말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정작 다림쥐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눈을 피해 먹이 봉지를 노렸습니다. 재빠르게 아이들 뒤에 있던 봉지를 입에 물고 다른 구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아이들을 애타게 만들어 놓으며 커다란 계획을 세웠네요.
우리가 어떤 문제점에 도달했다면 사고의 확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단순히 눈앞의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해결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주어진 틀에서 생각할 때 그 너머를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통찰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실제로 경험이 많은 사람은 틀을 벗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명언대로 과거 사고로는 현재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난이라 생각하는 건 답이 없는 게 아니라 풀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걸 찾아내려면 사고를 확장해야 합니다. 사고는 질문에 갇혀 있는 거 다 아시죠? 질문의 방식을 바꾸면 답도 보입니다.
'인터뷰 요령'이란 글을 봤습니다. 누군가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예, 아니요' 단답식으로 답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가 물은 사고대로 답하면 질문자나 당사자나 비슷한 사람입니다.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답변을 통해 질문자에게 사고를 확장시켜주세요. 그래야 다른 지원자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얼마 전 방통위원장 후보자 청문회를 보며 웃지 못할 상황을 봤습니다. 야당 국회의원이 ‘예,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자기 질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상대의 생각을 막겠다는 취지인데요. 세상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걱정했던 대로 실망의 댓글이 많이 달렸습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벌어지는 일로 보입니다. 내 질문보다 사고가 확장되어야 발전이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정답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틀 속에서 생각합니다. 주어진 질문이 우리 사고를 제한하는 것이죠. 그 질문을 깨는 건 사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제가 입사 인터뷰를 할 때 주어진 질문에 답만 했다면 원하는 취업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질문을 넘어서 임계점을 넘어갔습니다.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라’에도 언습한 내용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사고를 뛰어넘는 답을 내놓는 것은 어떨까요?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타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떤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부탁하는 자세를 바꾸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부탁하지 말고, 뭘 해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하라 했습니다. 그가 궁금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문제를 한 단계 올려버린 것이죠.
문제에 매몰되어 있으면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그래서 책과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니까요. 그리고 제3자에게 물어보길 추천합니다. 특히 같은 분야 멘토가 있다면 더 좋겠죠. 멘토가 없다면 펜을 들고 문제점을 적어보세요.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이어가세요. 갑자기 다른 점이 보일 겁니다. 의외로 더 큰 범위로 끌고 나가다 보면 금방 해결되곤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보다, 왜 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끌고 나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