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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아 Nov 16. 2022

에펠탑을 향하여

La Vie En Rose in Paris



센느강이 우아하게 흐르는 파리 7구. 해가 저문 거리를 따라 노오란 전구들이 옹기종기 얼굴을 밝힌다. 온세상을 비출만큼 환하진 못해도, 누군가의 가슴에 잔잔한 따스함을 주기엔 충분하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해진 황혼에겐 잊고살았던 낭만을 귀띔해주고, 왠지모르게 쓸쓸한 청춘의 잿빛 손엔 희망의 성냥개비를 건넨다. 성큼 다가온 크리스마스. 마음까지 녹이는 뱅쇼(따뜻하게 끓인 와인) 한잔에 저도 모르는새 이른 캐롤이 입가에서 비쳐나온다. 파리의 밤이 말갛게 떠오른다.

Eiffel Tower_Paris, France

한참을 걷다 또다시 길을 잃었다. 이번이 벌써 예닐곱번째. 내가 한눈을 파는 것인가 이 길이 복잡한 것인가. 더이상 이유나 원인을 찾는 것을 포기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이 곳 파리에 이미 도착한 것에 만족하고 마음에 자그만 여유를 허락한다. 해가 지기 전까진 에펠탑에 도착해 낙조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휴대폰 지도는 갑작스레 작동되지 않았고 나는 이미 걸어가기로 계획한터라 다른 교통편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없었던 그림으로 인해 다리에 느껴지는 피로감은 꽤나 묵직하다.

파리의 강변

감각을 깨워 한걸음씩 내딛다보니 길건너 테라스가 있는 2층짜리 고풍스러운 커피숍이 하나 보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커피에 크림과 크로아상을 곁들이고 있다. 그래, 저기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바깥이 보이는 자리로 안내받은 뒤, 향긋한 에스프레소에 크림을 얹어 마시는 스페셜 메뉴를 주문한다. 당충전이 시급하던 와중에 당연히 달콤할줄 알았던 크림은 생각보다 담백했고, 더도 덜도 아니게 커피의 씁쓸함만 잡아주었다. 살짝의 아쉬움. 그럼에도 워낙 커피를 사랑해서인지 나쁘지 않다. 입속을 가득 메운 원두의 향이 힘을 내라며 활기찬 응원을 선사한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는 알고보니 1887년 문을 열고,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등 유명 작가들이 작품을 쓰고 책을 읽던 역사의 공간이었다.

십여분이 흘렀을까. 짧은 휴식을 마치고 금방 일어났다. 어디선가 나는 초콜릿향에 주변을 둘러보니 코닿을 거리에 크레페(묽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속재료와 곁들여 먹는 요리)를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가 있다. 내 고향 부산에서는 크레페 집이 거의 없어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먹고싶은 마음이 언제나 가슴 한구석 자리한다. 더군다나 본고장에서 진짜를 경험할 기회가 오다니 놓칠세라. 갓구워 따뜻한 누텔라 크레페를 손에 받아들고 누가 보든 흐뭇한 미소로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길을 잃어도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누릴 것이 많다.

파리의 거리와 때맞춰 열린 플리마켓

해는 이미 저물고 에펠탑엔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한 버스 기사님의 도움으로 너무 늦지 않게 도착했지만 파란 하늘 아래 놓인 에펠탑을 보는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30년이 넘는 세월에도 한결같이 우아한 그 모습에 가슴이 설레인다. "More beautiful with the light! We should've come here later.(불 들어오니까 더 예쁘다! 좀 더 늦게올걸." 아쉬워하며 자리를 뜨는 나와는 반대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다. 센느강 다리에 기대 듬직하게 솟은 탑을 올려다본다.

해가 진 후 밝혀진 에펠탑

처음엔 내가 왔던 길에 확신이 없었다. 실은 나도 모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돌아갔던 그 여정에서 예기치못한 기쁨들을 마주쳤다. 더 선명한 눈동자와 예민한 감각으로 나를 둘러싼 것들을 탐험했다. 이방인보다는 살풋 친밀해진 기분이다. 연말, 곧 성탄절은 회귀점처럼 돌아오겠지. 지금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 고요하게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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