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반드룸에서 주고 받기
따갑디 따가운 태양 아래의 중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달은 12월부터 2월까지다. 겨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다소 민망하지만, 더위가 가신 곳엔 선선한 바람이 머무르고 하늘도 보기 드문 푸른색을 띤다. 그래서인지 방심했나보다. 지구촌 안에선 아침과 밤, 여름과 겨울이 닿아있단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인도 남부 케랄라 지역에 위치한 트리반드룸은 아직 푹푹 찌는 날씨에 습도까지 높아 가만히 서있기만해도 팔다리가 끈적끈적하다. 전형적으로 냉방 시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환경이랄까.
그럼에도 인도는 경험해보고 싶은 나라였다. 몇해 전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곤 쭈욱 다 읽어나간 류시화 작가의 여러 수필들 덕분에. 물론 땅 면적이 워낙 넓고 길죽해 도시마다 문화와 풍경이 천차만별이지만 내게 허락된 이 곳은 어떨지 호기심이 피어난다. 휴대폰 어플을 통해 택시를 부를까 하다 오토릭샤(세발 달린 오토바이. 툭툭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를 선택한다. 생각보다 더 덜컹대고 생각보다 더 느렸지만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대범하게 도로를 타는 기사님덕에 좌석 양옆을 쥐고있는 손이 미끄덩한다.
트리반드룸은 워낙 옛모습을 간직한 동네라 그런지 딱히 시내랄 것도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골목골목 걷다보니 로열 패밀리의 궁전 정원이 보인다. 들어가는 통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서성거리고 있으니 근처에 있던 한 남성이 손가락으로 문 하나를 가리킨다. 그제서야 보이는 'Entrance(입구)' 표시. 고맙다는 말에 엄지를 세우며 씨익 웃어보이는 그를 보자 나도 따라서 미소짓게 된다. 그 얼굴 그대로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는데, 처음엔 뻣뻣하던 직원의 눈가가 나를 따라 이윽고 반달모양으로 바뀐다. 이에 그치지않고 때마침 큐레이터 서비스가 있다며 정원 건물 안까지 데려다 준다. 종종걸음으로 들어서니 스무명 남짓 모여있는 사람들이 돌아보았고, 짧은 인사와 함께 싱긋 웃어보이자 따라서 활짝 웃으며 답해준다.
웃음은 어떤 매개로도 쉽게 번진다. 공기중에 색깔이 있었더라면 그 찰나의 순간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마치 꽃의 분말이 퍼지듯 청아한 색깔이 순식간에 주변을 물들였겠지. 매일의 시간을 허락해주는 세상에 나는 무엇을 돌려줄수 있을까. 어떤 것으로 잔잔한 바람과 고요한 별빛을 되갚을 수 있을까.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 가볍지만 힘이 센 몇 가지가 떠오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