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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아 Mar 31. 2023

기대함이 없던 때에

에딘버러, 스코틀랜드



그런적이 있다. 며칠, 아니 몇주동안 가슴 설레하며 기다렸던 날이 마침내 찾아왔을 때, 왠지모를 허무로 덮여버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기대했던 것과 별반 차이는 없지만 이미 생생하게 꿈꾸며 수없이 겪어본 탓인지 막상 그저 그런 경우. 그래서 ‘별 것 없네’하며 결론을 짓게되는 날. 그런가하면, 어떤 소원함도 없이 준비조차 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기쁨으로 다채로이 물들어 평생 잊지못할 순간이 되어주는 날 또한 있기 마련이다.

에딘버러의 길거리 모습

3월 스케줄표를 확인하던 저녁, 살짝 들떠있었다. 시렸던 겨울은 지나가고 다시 새싹 움트는 봄이 찾아오니까. 곳곳에서 푸름을 듬뿍 들이마시는 것만큼 영혼이 정화되는 순간이 또 있을까. 허나 스케줄표엔 민망하리만큼 그 전달 신청했던 비행은 달랑 하나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혀를 끌끌차며 화면을 넘기려다 길죽하게 표시된 일정이 하나 있길래 뭔가해서 클릭해본다. ‘Edinburgh with 1 Day-Off’(에딘버러, 하루 휴가) 생각지도 못한 스코틀랜드에서의 휴가라, 뭐 나쁘지 않지!

멀리서 보이는 에딘버러 성

이른 아침 비행치고는 고요하다. 기내가 잔잔하면 나중에 도시를 돌아볼 때 체력을 비축하기에도 좋으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밖을 나서자마자 갑작스런 빗줄기가 신고식을 연다. ‘과연 영국이구나’ 하며 하늘색 우산을 툭 펼치곤 조심조심 기차역으로 향한다. 여느 유럽처럼 에딘버러도 트램을 통해 30분안에 어디든 닿을 수 있다. 맨 먼저 갈 곳은 에딘버러 성. 도시 한복판의 높다란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에딘버러 성은 그야말로 랜드마크 그 자체다. 성 안에 나있는 길대로 유유히 오르면 온 시내가 한눈에 담긴다. 수평선 멀리까지 시선을 뻗으니 구름에 따라 비가 오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마저 구별된다. 오묘하고 신비롭다.

에딘버러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아주 오랜 역사와 현대문물의 하모니가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든 듯한 이 조화가 아름답다. 분명 트램에서 내렸을 때는 웅장한 건물들이 질서있게 자리한 영락없는 시내였는데 15분 정도만 외곽을 향해 걸으면 다양한 새소리가 들리고 울창한 나무들이 시원하게 뻗어있으며 그 사이에는 꽤나 넓직한 계곡물이 세차게 흐른다. 이런 환경이니 조앤 롤링이 영감에 가득 차 해리포터의 대서막을 열 수 있었지 않겠는가.

Museum Context_Edinburgh, Scotland

에딘버러 성 근처에는 해리포터 상점도 위치해있다. 입구부터 마법의 기운이 뿜어져나오는데, 해리포터의 열혈팬으로서 들어가지 않고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한쪽 벽에는 마법사별로 사용했던 지팡이들이 줄지어있고 다른 쪽은 호그와트(해리포터가 다녔던 학교) 기숙사별 굿즈, 영화에 나왔던 다양한 물품과 신문까지 진열돼있다. 생전 아이돌 굿즈는 쳐다본적도 없는데 여기서는 눈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그토록 궁금했던 버터비어와 개구리 초콜릿이라니! 해리포터 진성 팬인 동생 생각에 사무친다.

Calton Hill_Edinburgh, Scotland

둘째날에도 구시가지 쪽을 한참이나 둘러둘러 산책한다. 맘이 내키면 이번엔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바깥쪽으로 가보기도 하고 하고싶은대로, 발이 가는대로 맡겨본다. 때로는 높다란 언덕을 오르며 촘촘한 잔디밭에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득하게 누리는 잠잠한 여유. 이건 정말 계획지도 않았는데 공짜로 쥐어진 기분이다. 누가 알았을까. 앙망해본적도 없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가 나의 가장 좋았던 여행지 중 하나가 될줄이야. 삶이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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