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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B Sep 11. 2024

시시하고 식상한 것은 보통 우리 곁에 있다

시시하고 식상한 것에서 시작하는 행복


 행복을 간단한 수식으로 하면 이렇게 된다. a x 충족된 욕구 / 충족해야 하는 욕구(a는 사람마다 다른 상수). 성인군자들이 이야기하듯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충족해야 하는 욕구)을 줄이고 자신이 가진 것(충족된 욕구)에 만족하면 행복지수는 증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디폴트 값으로 변환하기 쉽다는 것은 행복지수를 낮추는 것으로 보인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 개인의 건강 상태, 부유한 정도, 인간관계 등의 객관적인 조건은 행복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과거보다 훨씬 건강을 챙기고, 소득이 증가하고, 훨씬 적은 시공간의 제약으로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에도 행복의 크기는 그에 비례하여 커지지 않았다. 

 

석유왕 록펠러의 자산은 현재 가치로 따지만 거의 500조에 달한다. 그는 1839년에 태어나 장수하여 1937년에 사망했다. 43살에 부자가 되었으니 반평생 이상 갑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런 갑부가 현재 우리가 누리는 대다수의 것들을 누리지도 못했다. 심지어 썬크림이 1928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으니 오늘날 여름날 필수품이 된 썬크림조차 150년 전 갑부는 누리지 못했다. 150년이라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보겠다. 약 50년 전 세계 최강국 미국이 국가적 사활을 걸어 완성한 아폴로 17호는 무려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기술 집약체였을 아폴로 17호에 탑재된 기술보다 훨씬 뛰어난 스마트폰은 대다수의 현대인의 손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기술 발전만큼 인류의 행복도는 증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개선되면 이를 금방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큰 기대를 한다. 그리고 한 번 거대해진 기대가 다시 줄어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탁기의 배신>이라는 책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의 큰 주제는 어째서 기술발전이 가사노동의 시간을 늘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설을 다룬다. 우리에게 월요병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처럼, 영어에도 우울한 월요일이라는 뜻의 'Blue Moday'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의 유래 중 하나는 월요일이 빨래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에 한 주간 입었던 옷을 보통 월요일에 세탁했다고 하는데 세탁기가 없던 시절 

불을 때고,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옷을 말리고 다림질하는 것까지 세탁이라는 행위는 중노동이었다.


그러던 19세기 후반 주택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면서 여러 가전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Make electricity your servant" "전기를 당신의 하인으로 만드세요"라는 문구로 많은 가정 주부에게 광고하며, 이제는 지긋지긋한 집안일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사 노동 시간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왜 그랬을까? 


청결과 위생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기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세탁해도 되는 옷을 지금은 이틀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빨아야 한다는 기준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진 청결의 기준을 다시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꼭 집안일뿐만이 아니라 직장 일 또한 그렇다. 과거에 한 통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면, 오늘날은 수 십 수 백 통의 메일을 보내고 확인해야 한다. 기술 발전이 10배 편안한 삶을 가져왔다기보다는 10배 더 바빠진 삶이 되어버렸다. 이에 대한 기저에는 우리가 가진 기준에 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은 보통 점점 커져만 간다. 과거에 가지고 싶었던 것이 이미 당연한 것이 되고, 당연한 것 이상의 것을 원하는 욕구는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에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행복은 시시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시하고 식상한 것은 보통 우리 곁에 있다.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다 보면 시시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바라볼 때 시시한 것들의 소중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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