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문생각] 123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천원이 나왔다. 갑자기 퇴계 이황의 존안을 뵈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황이 지폐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철학과 교수님께서 분개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이황이 수많은 지폐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세웠는지 모르겠다. 현대 한국에서 사단칠정이나 이기가 그렇게 중요한 개념인가? 솔직히 윤사나 생윤을 배우지 않은 나로서는 한국사 시간 말고 저 개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뭔지도 잘 모른다. 이황이 위대한 철학자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성리학의 비중이 매우 미미한 한국 사회에서 무수한 위인들을 제치고 지폐에 등장하는 것이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오천원의 이이도 업적을 보면 솔직히 비슷한 식의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기가 별개일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이게 오천년 역사의 민족을 대표할 만한 업적인가? 물론 이이는 사실상 순수 유학자였던 이황보다는 현실정치가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기는 한다. 그러나, 슬픈 점은 본인 권력 확립에 급급했던 선조나, 성리학만 외쳤던 사림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이가 외쳤던 개혁안 중 실현된 것은 거의 없었다. 최소한 현실 정치가로서는 그를 능가하는 개혁가가 조선시대만 해도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이황보단 낫다지만 화폐에 등장할 정도의 위상을 갖추었는지 의문이 든다.
신사임당은 뭐랄까…. 미국 영화에서 인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곁다리로 끼워 넣은 흑인이나 아시아인 조연 같은 느낌이다. 성별 측면에서의 다양성을 위해 여성이 한 명은 필요했다는 취지에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신사임당이야 했을까? 그녀가 뛰어난 예술가긴 했지만, 전근대 여성이라는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여러모로 화폐의 인물로 등장하기에는 모자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더라도 화폐 속의 인물들이 상당히 한정된 범주 내의 인물들로 한정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것이 1397년, 이순신이 전사한 것이 1598년이니 대략 200년 동안 원화에 들어 있는 인물들이 모두 태어나고 죽었다. 넓게 보면 5명 모두 유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엄격히 따져도 40%가 유학자다. 각 인물 간의 관계를 봐도 흥미로운데, 세종대왕을 빼고 4명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황은 율곡 이이의 선배 격인 인물이고,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며, 이순신은 같은 집안이었으며, 같은 시기 관직에 있기도 하였다. 진지한 설명은 아니지만,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만 봐도 상당히 한정된 범주 내에서 인물이 선정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 등 근현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지적될 만한 사항이다. 해외의 여러 국가가 근현대 인물을 위주로 지폐 인물을 구성하고 있고, 과거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 중 상당수가 독립운동가를 지폐의 인물로 선정한다는 점에서, 우리 지폐에 근현대 인물이 없다는 점은, 특히 조선시대에 한정된 현행 인물 선정을 고려해 봤을 때, 매우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분열과 갈등, 충돌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를 고려해 봤을 때,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이미 10만원의 인물로 김구를 선정했다가 보수 단체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대중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상당수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특히 광복 이후에 사망한 독립운동가의 경우 해방 이후 행적에 대한 논쟁까지 덧붙여진다. 거기에 반일 운운하며 독립운동가를 넣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주장까지 가면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경우에도 이러한데, 정부 수립 이후의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지폐에 넣을 만한 위인 하나도 합의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화폐 속 인물에 대해 말이 많으니, 누구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은 인물로 권종별 화폐 인물을 통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마치 인도의 모든 지폐에 간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 방안을 채택할 시 위조지폐 방지와 각 지폐 가치의 직관적 이해를 돕기 위해 지폐의 인물에 표정을 도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천원은 울상으로, 오만원은 해맑은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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