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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을 덕질할 수도 있어

[꼬문생각] 여울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좋아했지만 버섯을 좋아하는 건 또 처음이다(혹시나 싶어 덧붙이자면 편식쟁이라 버섯을 먹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우연히 제주도의 숲에서 만난 ‘마귀광대버섯’에 홀렸다. 그 작고 귀여운 것이 ‘마귀’라는 사악한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악착같이 생존해 왔을지 생각하면 어쩐지 아련해진다. 


[그림1] 악착같이 생존하는 마귀광대버섯 ⓒ여울


만화 그림체로 그려진 마귀광대버섯, 머리 부분은 빨갛고 하얀색 반점이 있다. 줄기부분엔 억울하다는 듯울고 있는 이목구비가 달려있다. 그림 설명 끝.


마귀광대버섯에 홀려 온갖 버섯 다큐멘터리를 섭렵할 때, 버섯 포자가 터지는 짧은 순간들을 포착한 영상을 보며 벅차오르는 마음에 눈물이 흘렀고,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버섯이 귀엽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이렇게 눈물이 흐를 수 있나? 내가 이렇게나 덕후라니… 그것도 버섯 덕후…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스윽 닦으며 대체 이 벅차오름의 기원은 무엇인가 돌아보기로 했다.  

  

어릴 때 아주 작은 반려 달팽이를 키웠다. 과학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준 달팽이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심한 끝에 나의 첫 반려 달팽이에게 ‘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림2] 기억 속 팽이 ⓒ여울


달팽이의 그림. 노란 몸체에 갈색 집을 달고 있다. 그림 설명 끝.


손에 올리면 느릿느릿 기어가며 점액을 뿜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점액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신호 같아 열심히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숙제로 내주신 달팽이 관찰일지(아마도 어떤 먹이를 얼만큼 주었는지 기록해야 하는)에는 팽이의 촉감이 부드럽고 촉촉하다는 말만 잔뜩 나열했다. 하지만 매미가 쉬지 않고 울어대던 어느 소란한 여름에 팽이는 움직임을 영영 멈추었다. 자주 가던 놀이터에 있는 한 나무에 팽이를 묻었다. 그날부터 놀이터를 지날 때마다 그 나무에 들렀다. 나무 밑에 고동색 껍데기를 가진 어떤 달팽이가 돌아다니지는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였다. 그러나 그 나무에서 마주친 것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박새들, 그리고 이름 모를 버섯들이었다.


더 이상 팽이를 찾지 않았다. 여전히 그리웠으나, 팽이와 똑같은 달팽이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대신 팽이를 묻은 나무에 사는 새들과 버섯을 보기 위해 놀이터에 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새들이 나무 구멍에 은밀히 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렁이의 촉감은 달팽이와 달리 뻑뻑하다는 사실도(이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의 놀이터 생태 탐방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중단되었다. 내 일상이 버거운데 새와 버섯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탐방할 기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팽이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새와 버섯에 대한 기억은 짧은 추억으로 희미해져 갔다. 


몇 년이 흘러 제주도의 곶자왈, 그러니까 파호이호이 용암이 만들어낸 숲에서 나는 버섯 무리와 다시 마주쳤다. 흙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숲과는 달리 곶자왈은 지반이 돌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나무는 흙 속에 뿌리내리지 않고 돌의 습기를 마시며 산다. 죽은 나무의 밑동에서는 새로운 묘목이 자라기도 한다.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는 인간에 의해 버려지지 않고 몇백 년의 시간을 그대로 견디어 숲의 일부로 돌아간다. 버섯은 나무와 함께 살거나, 죽은 나무에 기생하거나, 생명이 사라진 잔해를 분해한다. 문득 팽이를 묻은 나무에 살던 버섯이 떠올랐다. 내가 보았던 버섯, 나무, 지렁이, 곤충에게 팽이가 좋은 양분이 되었을까? 그 버섯의 균사체가 팽이를 분해했다면, 팽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 화단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으리라. 

  

팽이를 찾지 못한 것은 팽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팽이가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지 몰랐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내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지구에 존재하게 될 거다. 내가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존재가 이 작고 귀여운 아이 덕분에 지구에 계속 존재할 수 있다니! 곶자왈에서 마주친 버섯 무리. 그리고 숲에서 태어나 몇백 년의 시간을 견디어 결국 숲으로 돌아가는 나무들. 이 아이들을 생각하면 역시 눈물이 차오르는 건 당연했다.


나의 버섯 덕질을 이상한 눈으로 보던 친구에게 이 장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는 덕질 할 수 없는 대상을 덕질 하는 재능이 있네”


여울 | choibook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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