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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독자와의 만남

총 세 분이 신청해 주신 이번 독자와의 만남은 1월 15일 19시에 진행됐습니다. 교직원이신 임춘택 님과 한국근현대사연구회에서 활동 중인 나경 님, 정경대 신문사 《호안스》에서 활동 중인 정태 님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자리해 주신 분들과 《고대문화》 151호 및 《꼬문생각》 151.5호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책 전반 평가


나경
저는 이런 문제에 관심은 있는데 뉴스를 찾아보면서 제 관점을 쌓아 올리기에는 어려운 주제들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정리를 해놓아서 좋았어요. 다른 곳에서 한 학기 세미나로 할 만한 주제들을 한꺼번에 엮어주셔서 지난 1년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정태
저도 이제 신문 기자로서 글을 쓰는데, 월간지다 보니 깊이 생각할 여유 없이 일단 써내는 데 집중했어요. 《고대문화》를 읽으면서 우리도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시간이 있었다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다 생각해볼 만한 무게감 있는 주제들이라 이런 주제들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되게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임춘택
책이 조금 얇아져서 읽어볼 만한 마음이 생겨서 읽었었고요. 여러 가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실에서


해진 꽤 무거운 마음으로 작성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뉴스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마다 많이 울었고 힘들었는데 대학교에 와서도 지속해서 그런 내용을 접하다 보니까 무감각해지는 때가 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순간을 맞으면서 제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옳지 않다고 믿었던 일들을 그냥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고 나와 완전히 연관되어 있지 않은 사안들이라고 생각해 왔던 게 잘못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었고요.

「편집실에서」를 다시 읽으면서 ‘모두에게 탓이 있다’고 적은 부분이 약간 건방지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 불교 인드라망을 떠올리며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내용을 적었었는데 되게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성기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경 이런 글은 단순히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정보들을 알리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여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방감을 주잖아요. 그런 점에서 계속 글을 써주시는 거에 일단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독자 만남에 참석했어요. 그리고 방금 ‘철학적으로 작성했다’는 부분이 저는 처음에 사실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태 저 역시도 이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상대를 타자화해서 비난하는 게 제일 쉬운 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이걸 평가하기만 해서는 내가 어떠한 변화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이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인 것 같기도 해요. 선민의식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상 저도 공감이 엄청 많이 됐어요.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연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해진이 말해준 무기력 같은 것들은 해진만의 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공통으로 지닌 어떤 정서가 아닐까 해요. 이때 이런 상황에 빠진 우리들을 악마화하지 않고서 책임을 묻는다고 할 때,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고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좀 더 문제가 되는 상황이 많은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측면에서 무기력을 좀 더 느끼는 것 같아요.

  

특집 – 여는 글


임춘택 여기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지상에 발을 디딘 글 같아서 읽고 몰입하기 좋았어요.

 

윤석 본인의 삶에서 나온 슬픔에 더 집중한 글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약간의 답답함은 좀 없지 않아 있었어요. 이 글에서 어떤 것을 대안으로 삼아야 될까 생각했는데, 굳이 어떤 대안을 내놓지 않아도 자신의 경험을 진솔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거야말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었나라고 생각합니다.

정태 원래 이분 문체가 유려하신지 모르겠지만 글이 소설처럼 느껴졌어요. 1인칭 시점이라 몰입하기 쉬웠고, 여는 글의 기능을 충분히 한 것 같습니다.

 

나경 『원미동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특집 – 전세 사기, 악의를 용인하는 거래


윤석 주거권은 전세 사기 이전부터 항상 빈곤의 핵심 화두로서 존재해 왔기 때문에, 처음 쓸 때 둘 사이 긴장이 있었거든요. 글조각들을 엮으며 나온 결론은, 전세사기 정국은 구조적인 빈곤 배제와 정책적 촉진이 맞물려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전세 사기를 “악의를 용인하는 거래”라고 썼어요. 특정인의 악의 뿐만 아니라 전세라는 특수한 제도 내에 그 악의를 용인하고 제도 내에 편입시키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마지막, ‘결론을 대신해서’에서는 대안을 논하는 대신 이 한계들이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야기하려 했어요. 전세 사기에는 피해자들만큼이나 수혜자들도 많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시장 제도 바깥에서 시장을 지탱하는 신뢰를 다시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쳤습니다.


임춘택 전세 사기 문제를, 특히 현 정부에서 피해자를 개별화시키는 문제를 지적해 준 게 좋은 지점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제목이 저는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세 사기’는 이미 악인데 이게 무슨 말이지? 한국만의 고유한 부동산 제도로서 전세가 유지됐던 특성이 있었던 거고, 지금 전세 사기가 대폭 나타날 수 있었던 거는 과거와 다른 어떤 구조가 있었기 때문인 건데. 그러면 전세 문제와 사기의 문제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진 문제를 구분해서 이야기 해주면 더 정확하게 문제를 보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좀 했어요.

윤석 제목에서 핵심으로 하려고 했던 단어는 ‘용인’이에요. 전세 사기가 일단 일어났는데 그거를 잡기가 어려운 거래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걸 밝히고 싶었어요. 일단 전세라는 게 취약한 기반에 있었고 거기다가 잘못된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취약한 기반의 도화선이 됐다라는 식으로 좀 쓰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드러났다면 그건 글쓴이의 책임입니다.

정태 
저도 마찬가지로 악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2000년대 후반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랑 전세 사기를 유비한 내용들을 통해 최대한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보였다고 생각해요. 중간중간에 조금 불친절한 서술들이 조금 눈에 걸리기도 했어요.

13페이지에서는 부동산이 일부 소수 기득권층한테 집중되고 있다고 얘기했는데, ‘결론을 대신하여’에서는 수혜자가 많다라고 이야기해서 이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혼동이었거든요. 

 

윤석 수혜자가 많다라고 얘기를 한 거는 상위 25%와 상위 10%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전체 주택의 93.8%를 가지고 있는 게 상위 25%라는 의미에서 말한 거예요. 25%나 10%라면 길 가다가 무작위로 10명 중 혹은 4명 중에 한 명이란 뜻인데 그 정도면 꽤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피해자들 못지않게 그만큼 많은 수혜자들을 만들어 냈다라는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나경 저도 전세 사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엮기보다, 전세를 키워드로 던지고 전세 사기는 글을 여는 용도로 이용하는 것이 제목에 맞는 글을 쓰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집 – 고양이들의 아파트


정태 철거민들과 고양이들을 동일시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앞부분 서사가 너무 길어진 바람에 조금 흐름이 안 맞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주제 전달에 큰 문제는 없지만, 문제의식이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임춘택 고양이가 갖는 고통의 층위와 철거민이 갖는 고통의 층위가 되게 다를텐데 그걸 마치 비유의 대상으로서 보는 게 안 맞다고 생각했어요.

 

해진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우리가 흔히 빈곤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내던 공간에서 쫓겨나는 논리랑 비인간 동물들이 점유하고 있던 공간에서 쫓겨나는 논리가 동일하다는 지점에 초점을 맞췄고요.
편집 회의에서도 사람이랑 동물의 차이를 조금 더 명확하게 짚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나왔었는데, 글을 마무리할 때는 우리가 소외된 존재들의 권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로 초점을 이동시키며 마무리를 지었던 것 같아요.

민상 사실 ‘개발을 하는데 비인간 동물을 왜 고려해야 해?’라는 게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논리를 마련하기가 힘들긴 한 것 같아요. 인간의 층위로 비인간들의 어떤 주거권이나 이런 걸 설명하기가 아직도 정말 요원하기 때문에요. 그렇다면 철거민들에게 적용되는 논리가 비인간들에게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들 가운데서 어떤 같음의 논리를 말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거는 이 글만의 책임으로 놓기에는 전반적으로 관련한 말하기나 글쓰기 자체가 좀 많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여기서 아예 그냥‘같다’고 비약을 뒀을 때 그게 가져오는 효과가 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경 고양이를 통해서 인간이 주거권을 잃게 되는 부분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글은 비인간으로 끝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 글에서 인간이 나오는 건 약간 비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서사를 이용한 느낌이 돼버리거든요. 그래서 그게 조금 잘 안 와닿았다는 생각이 들고. 이 글의 구조가 만약에 반대였으면, 그러니까 인간을 위해서 비인간의 서사들을 갖고 왔으면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윤석 어떤 인간으로서 인격을 실천할 수 있는 것에서 유리되는 것을 비인간화라고 본다면, 우리가 고양이라는 틀을 통해서 이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충분히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닐까. 어떤 주택 재개발을 그 공간을 점유한 유기체를 몰아내는 방식을 이야기하기도 해서요.

 

나경 인간 중에서도 비인간화된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를 해 주시는 거잖아요. 근데 사실 이 글의 마지막은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두 개념이 좀 윤석이 설명하셨던 부분이랑 조금 달랐던 것 같다라고 생각이 들어요. 근데 윤석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특집 – 성매매 집결지 재개발: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


해진 성원이 성매매 여성이 쫓겨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용주골을 방문했고, 여성 인권 수호와 보장을 위시하면서 집창촌을 재개발하는 현실을 담아낸 글입니다.

 

임춘택 성매매, 재개발, 지역 발전에다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면서 다양한 이슈들을 모아 쓰신 것 같아요. 좀 더 현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경 저는 이 글 좋았어요. 제일 관심 있었던 주제라서요. 그냥 이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재밌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성매매 종사자들에게 있어서도 여러 층위가 당연히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주거권 문제가 그러한데, 당사자들은 성매매 업종 종사자이면서 동시에 주거권을 박탈당하는 존재이기도 해요. 주거권은 당연히 보장돼야 하는 권리임에도, 일부는 '성매매는 근절돼야 한다'는 명제를 덧씌우면서 이들의 문제를 축소하고자 하잖아요. 당사자들에게 다양한 정체성이 엇갈려 있는 만큼, 각 의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선명하냐에 따라 가장 단순한 결론이 내려지곤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이 단순하려면 한없이 단순하게도, 복잡하게는 한없이 복잡하게도 풀 수 있는 주제를 가장 인류애적인 시선에서 풀어내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은지 저도 숙영이 되게 많이 현장을 찾았는데, 그만큼의 노력이나 현장성이 글에서는 드러나지 않아서 조금 아쉽다고 느꼈어요. 근데 오히려 현장성이 덜한 효과를 노린 거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편집실에서」 랑 약간 톤이 비슷하다라고 느껴졌거든요. 약간의 무력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하기는 한다 이런 느낌. 의도적으로 현장성이 드러나는 부분들을 좀 배제했던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저는 맨 마지막 무릎 꿇기 문단에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 혹은 위계질서,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있는 숙영의 시선이 느껴진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이런 전복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장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거리를 두는 게 오히려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석 성매매 · 성 착취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도들과 연계되고 이를 활용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성 착취의 기반들을 강화시키고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결절점이 발견이 된다는 점에서 이 글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아쉬운 점은, “왜 하필 여기에 고층 아파트가 세워지는 건데?” “안 된다”라고 했을 때, 그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좀 더 명확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우리의 어떤 답답함에 대해서도 좀 해결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지점이죠.


특집 – 내 죽음의 자리 지키기


은지 우선 전체적인 구성은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는 죽음과 애도 중에서도 누구의 죽음이 더 많이 밀려나고 있냐를 생각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밀려나는 이들의 자리가 더 불안정하다는 내용입니다.

윤석 사회학과에서 이런 걸 썼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을 했고요. 특히 합리적인 주체라고 상정되는 근대적 주체들에게 가장 맹점이 되는 부분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죽음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제도 내부에서 이 육체로서 죽음의 결과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어떻게 용인을 해주고 누가 그거를 담당할 것인지를 규정하고 하는 것들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성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그 정상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점을 지적해주어서 아주 재밌었습니다.

 

임춘택 쪽방촌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모습들을 계속 경험하게 될 거 아니에요. 이웃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빈곤의 모습 아니면 빈곤의 모든 관계가 산업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이런 장면을 쪽방촌이 아니라 독자들과 훨씬 가까운 지역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어요.

 

정태 성소수자 얘기가 빈곤이 포섭될 수 있냐는 의문을 갖고 읽었던 것 같아요. 고독사 포함해서 이 죽음을 사회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이게 빈곤과 관련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죽음의 자리 지키기라는 주제 내에서는 되게 잘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경 오히려 저는 이 글이 빈곤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관계 측면에서는 성소수자나 쪽방촌 사람들이 어쨌든 사람 관계에서부터 소외된 사람이니까. 제가 학과에서 배우고 주변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주제라서 그런지 되게 다른 주제보다 와닿는다고 생각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은지 성소수자와 빈곤 관련해서 저희 내부에서도 성소수자 이야기랑 빈곤 이야기를 좀 구분해야 할 것 같다는 피드백이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개념인 빈곤을 빈곤인이라고 임의로 여기서 불렀고, 성소수자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빈곤이랑 크게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아까 말씀 독자분이 짚어주셨듯이 관계의 빈곤, 그리고 어떤 사회 연결망 안에서 부재한 위치 이런 측면에서 저는 빈곤이라는 특집과 연결 지어서 썼습니다.

민상 분명히 공통성에서 말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저도 이 흐름 자체에 굉장히 반가움을 느끼면서 편집회의 때부터 계속 지켜봤었는데, 뭔가 단행본 사이즈로 가야 할 이야기가 한 글에 모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다들 이번 호에서 좀 신나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본격적으로 얘기하는 좀 호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쳐내는 게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칼럼 – 잠재적 마약 사범


해진 저는 마약을 또 다른 관점에서 조명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전개를 했었고요. 그래서 마약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식으로 그 관점이 형성되었는지를 짚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면서 마무리했습니다.

윤석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1주기가 훌쩍 넘은 상황에서도 원인을 마약 혹은 어떤 연예인들과 마약을 연관시키기 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국가 체제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어떤 통치의 방식으로서,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는 방식으로서 마약이라는 것도 되게 분명한 것 같아요.

해진이 쓴 것처럼 마약을 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아요. 실제로 그냥 멍해지죠. 뇌가 쪼그라들고 근데 그게 어떤 우리 사회가 마약을 다루는 방식은 아니거든요.

해진 그래서 방금 윤석이 얘기해 주었듯이 마약이 실제로 생물학적으로 인간한테 좋지 않다는 점이 과학적인 사실로서 인정을 받잖아요. 그래서 그게 오히려 국가의 개입이나 제안을 더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게 적극적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좀 마지막에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정태 처음에는 마약의 위험성에 관해서 얘기하는 글인가 싶은데 마약을 명분으로 삼아서 국가의 폭력을 전달하는 기재로 쓰이는 걸 얘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러한 내용이 되게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춘택 근데 사실 저는 마약범죄가 대표적인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표현이 맞나 싶어요. 얼마 전에 에콰도르에서 갱단이 생방송 중에 방송국에 난립한 사건이 짤로도 많이 나오고 그랬었는데, 결국 에콰도르가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마약 유통 국가가 됐기 때문이잖아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떤 범죄는 물론 아니고 범죄 현상도 아니긴 하지만, 이 특성이 우리 눈에 띄기 시작하면 이미 막을 수 있는 지점에 온 걸 텐데 위험하지 않을까.

 

해진 마약을 단순히 투약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현시점에서의 문제를 지적하려고 마약이 범죄가 아닐 수 있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없다는 거는, 마약이 사회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냥 마약을 하는 개개인을 잡아내고 그 사람들을 그냥 사회악이라고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범죄가 아닐 가능성을 여기서 제시했던 것 같습니다.

나경 그걸 의도하고 쓰신 것 같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마약 범죄라는 말을 들었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버닝썬처럼 마약을 누군가에게 유통하거나 투약한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그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행위의 양상들을 생각해 봤을 때 마약이 피해가 없는 범죄가 맞나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마약을 선택하는 과정은 물론 자발적일 수도 있고 타의에 의한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끊는 게 자발적이기 쉽지 않잖아요. 어쨌든 이 사람들을 어떤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이 치료받을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음지로 몰아넣는 것보다는, 보건학적으로도 이 사람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지 않고 어떤 치료 받아야 하는 대상, 사회 구성원으로 들일 대상으로 봐야 하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칼럼 – 대중교통 다시보기


임춘택 약간 제목을 좀 달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포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이 사실은 저는 잘 몰랐던 사건이라 되게 재미있게 읽었는데, 차라리 지역사회 붕괴라든가 그런 얘기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을 텐데.

해진 석규가 현실적으로 대중교통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대중교통이 중요한 이유를 대중교통을 다시 봄으로써 제시를 하고 싶어서 제목을 다시 보기라고 짓지 않았을까

임춘택 늘 구호처럼 세계를 변혁하려고 너무 노력하다 보니까 거기서만 머무르고 거기서만 촘촘하게 보여줘서 여기까지 생각하게 하면 되는데, 꼭 우리 독자님들이 여기까지 생각해야 돼요를 박아놓고서 연결하려고 하는 어떤 노력들이 도리어 조금 글의 충실도를 떨어뜨리는 약간 그런 느낌이 많이 받았습니다.


윤석 기반 시설을 팔아버려서 겉으로는 예산 경감이란 명목이 이뤄진 척하지만 실제로는 시민들에게 경제적 기반의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것이고, 또 원청-하청-시민의 이중의 착취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저는 이 글을 읽고 사모펀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처음 알았어요. 『한국 경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였나, 거기서 사모펀드가 당기 순이익을 끌어 주가 차익을 빼돌리고 장기적 성장을 악화시킨다고 나와 있었는데, 이게 산업 전체의 입장에서 도움이 될 리가 없지만 예산 문제라고 하면 쉽게 합리화하고 넘어가죠. 이 합리화가 재밌는 것이죠. 예컨대 운전사더러 ‘타이어를 아껴쓰라’라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데 예산 문제라고 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쉽게 합리화된다는 것이죠. 

 

칼럼 – 지금부터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아쎄이!

 

민상 군대에 있을 때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층위에 대해서 되게 많이 생각했어요.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나 자본주의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부분부터 가장 구체적인 폭력의 지점까지 정말 폭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이거를 하나의 어떤 기술이나 하나의 설명으로 포괄하려고 하는 거는 언제나 실패한 음모론일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었거든요.

그래서 인터넷 밈에 둘러싸인 우리의 상황 자체가 음모론적이라고 변명을 해봤어요. 해병문학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진지한 문학이나 담론에 미달하는 것들을 마치 문학처럼 간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에 관한 나름의 음모론을 작성해 보고자 했습니다. 20대 남성들의 보수화와 백래시를 마주하는 상황에서 이는 그들을 포섭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모순이나 분노를 적절한 대상을 향해서 돌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일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면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정태 사실 이런 걸 아예 몰랐었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충격적으로 읽었어요. 근데 이 이대남의 특성 중의 하나가 이러한 상상을 통해서 저항과 희망을 떠올리기보다는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이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되 그 아래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그런 느낌이거든요. 
되게 피해자화가 많이 되어 있는 것 같아서 과연 음모론이 이런 기대와 역할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어요.

민상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회로나 경로 같은 거를 좀 만들어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말도 안 되죠.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고요. 그들이 분노를 적절한 곳에 쏟아붓게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상처받는 일이 필요한데 이들이‘피해’받았다고 하는 일들은 정말 제대로 상처받았다기보다는 어떤 피해 속에 빠져서 “지금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는 사회적 소수자보다 우리가 더 진짜 사회적 소수자고 저들은 가짜 소수자다”라고 하는 담론 속에서 멈춰 있거든요. 자신들을 진짜 약자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취약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어떤 형태인지부터 일단 기술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임춘택 저도 해병문학이 뭔지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읽다 보면 이 해병문학이 창작되는 현상에 대해서 좀 더 거리를 두면서 차분하고 이지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했던 건 아닐까. 왜냐하면 이 서브 컬처가 남성들의 피해자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저항하지 않고 그냥 이 세계에서 피해자인 채로 살겠다는 식의 패배주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차분하게 비판하고 분석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고대문화》답지 않았을까 약간 그런 느낌입니다.

민상 저도 그런 게 약간 추구하는 어떤 글쓰기의 전범인데요, 제가 이걸 쓰려고 하다 보니까 이 글을 쓰면서 결국 해병문학을 싫어하게 되긴 했어요, 질려버려서. 근데 이제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제가 정말 힘들었던 시기에 솔직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해병문학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해병문학과 이 글의 한계나 이런 것들은 저도 정말 너무 공감하고 그래서 지금은 좀 더 좀 식어서 차갑게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는 그게 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은 제게 있어서는 해병 문학을 보내주는 작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경 저는 되게 글이 재밌었던 이유는 밖에서 비판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정말 즐겼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아시는 상태에서 글을 쓰시고 그걸 다시 또 분석하고 결론까지 내주시니까 이 글에선 오히려 그런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꼬문생각 전반


해진 부록 책은 발행 체제를 바꾸면서 새롭게 만든 책이고요. 호흡이 길지 않아도 되니까 필진이 생생하게 생각하는 바를 짧은 글을 담아보자 해서 만들었습니다. 어떤 논리로 전개한다기보다는 그 필진의 단상이나 구체적인 생각들을, 욕망을 풀 수 있는 창구로 만들고자 했었습니다. 

 

나경 이렇게 상하좌우를 왔다 갔다 기준으로 삼는 이런 디자인을 맡기신 건지 아니면 구상 기획을 하신 건지 궁금해요.

해진 저희가 본책에서는 규정 규율도 엄격하게 거치고 규격이 다 정해져 있는데 그거를 완전히 거꾸로 적용을 해보자 해서 디자이너님한테 권한을 모두 드리되 전체적인 구상은 전달해 드렸었습니다.

 

임춘택 아주 좋은 시도인 것 같아요. 좋은 시도 같은데 예를 들면 저는 「스마트 대출 반납기」글은 재밌었는데 앞쪽에 얘기 스마트 단말기 관련 이야기가 조금 긴 것 같아요. 그리고 문장을 더 간결하게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해진 본책은 다른 필진이 교정 교열을 봐주는데 부록책에서는 필진의 글쓰기 습관을 유지하려고 그런 단계를 축소하기도 했습니다.

나경 저는 솔직한 감상으로 읽기 쉽지 않았어요. 너무 이렇게 빙글빙글 돌아가지고. 아니 처음에는 이렇게 분명히 읽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그러면 거꾸로 읽어야 하는 책인가 보다 하면서 거꾸로 또 읽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계속 이렇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아서 솔직히 쉽지 않았어요.

민상 처음 하는 시도라서 뭔가 주목을 끌 필요는 있었던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재밌는 시도였고 충격은 확실히 줬던 것 같습니다.

해진 앞으로 디자인 같은 부분은 많이 바꿔나갈 여지가 있으니 참고하겠습니다. 피드백 주시고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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